진위 서탄면 회화리, 교실 17칸
면장 이필성 발기, 1000원 모금

 
“경기도 진위군 서탄면은 종래 교육기관이 완전치 못하여 일반 주민은 남녀를 물론하고 유감으로 지내는 바, 동면장 이필성의 발기로 경비 천원 예산을 세운 후 동면 회화리에 진서강습소를 설립케 되었는데, 지난 10일부터 교실 17칸을 건축하게 되었으나 이미 모집된 학생은 80여 명에 달하였으므로 날마다 교실 낙성되기만 고대하는 중이요, 경비 천원으로 말하면 이면장의 활동으로 전부 주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중 5백 원을 자기가 부담하기로 하고 그여 5백 원은 일반 학부형들이 부담하게 되었다고”(『동아일보』 1924년 4월 14일)
평택지역에서 보면 서탄면 회화리는 일찍부터 외부의 문물이 들어왔던 곳이다. 서탄면의 중심지였던 회화리는 평택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가 유입되어 정착했다. 뿐만 아니라 황구지천을 끼고 자리한 회화리는 비옥한 토지를 형성하고 있어 이른 시기에 일본인들이 눈독을 들여 적지 않은 땅을 소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주재소가 생기기도 했다. 또한 회화리는 3·1운동 당시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이기도 하다.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교육열이 높아지자 회화리에서도 사설 교육기관이 들어섰다. 회화리에 교육기관이 없던 것이 항상 유감이었는데, 1924년 당시 서탄면장이었던 이필성(李弼成)의 발기로 이해 4월 10일 진서강습소(振西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진서강습소는 개교와 동시에 8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였고, 17칸의 교실을 건축한 것으로 보아 규모가 비교적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서강습소 설립 비용은 1000원으로 책정하였지만 이를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서탄면장 이필성이 500원을 부담하였고 나머지 500원은 강습소에 입학한 학부모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충당했다. 진서강습소 설립을 주도한 이필성은 1921년부터 1927까지 약 7년간 서탄면장으로 활동했다. 진서강습소는 설립 이후 운영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설립 당시 교실이 낙성되기만을 기다리던 학생들의 모습에서 교육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1920년대 설립된 강습소의 교육에 대해서는 대부분 민족교육을 강조하였는데, 진서강습소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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