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당진간 자동차로 개통
4월 20일부터, 1일 2회 운행
평택자동차운수주식회사 운영
“평택 당진 간 승합자동차(平澤唐津間乘合自動車)는 당진나루의 연락선(連絡船) 불완전으로 침체되어 일반 승객의 불편이 많아서 언제나 완전한 연락선을 설비하여 승합차가 개통하기로 기다리던 중 평택자동자주식회사(平澤自動車株式會社)에서는 금번 당진연락선을 완비하는 동시에 지난 20일부터 1일 2회의 자동차를 운전하여 승객에게 편리를 주는데 자동차 발착시간표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 1일)평택과 당진은 가까우면서도 먼 곳인 듯하다. 대진나루에서 보면 바로 앞이지만 자동차로는 둔포-아산을 거쳐 당진으로 간다. 지금은 서해대교를 건너면 바로 당진이지만 일제강점기까지는 여전히 먼 곳이었다. 그래서 당시만 해도 당진으로 가려면 대진나루에서 배를 이용하는 편이 용이했다. 그렇지만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이용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늘 위험이 뒤따랐기 때문에 승객의 입장에서 배를 이용하는 것은 매우 불편했다.
그런데 근대라는 시기에 들어서면 교통 체계가 달라진다. 바로 철도와 도로이다. 철도가 부설되기 전에는 진위의 봉남리가 중심지였지만, 철도가 부설되고 평택역이 설치됨으로써 현재의 원평동이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도로도 평택을 근대도시로 탈바꿈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했다. 평택의 도로는 천안으로 이어지는 국도와 둔포~아산으로 이어지는 지방도가 있었다. 그러던 중 1935년 4월 20일 둔포~당진으로 이어지는 자동차로가 개통되었다.
평택서 당진까지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했다. 평택에서는 오전 9시 40분과 오후 2시 30분에 출발했고, 오후 1시와 오후 5시 45분에 각각 도착했다. 3시간 20분이 걸린 셈이다. 서해대교를 건너는 요즘에 비하면 6배 이상 걸렸다. 평택과 당진 간 운행하는 회사는 평택자동차운수(주)였다. 이 회사는 1929년 5월 10일 일본인 모리(森賢吉)·다카하시(高橋利信)·이종훈(李鍾勳)·이민두(李敏斗) 등이 5만원의 자본금으로 설립되었다. 주로 자동차를 이용하는 화물운반이 주업이었지만 승합차로 승객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평택시사신문
ptsis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