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넘기 힘든 고개

 

1950년대만 해도
이 땅의 구석구석은
조선시대 문화와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보릿고개’는 여전히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넘기 힘든 산마루였습니다.
사람들은 막 보리이삭이
패기 시작하는 4월 초가 되면
낫으로 보리이삭을 끊어다가
밀가루를 풀어서는 죽을 쑤어
둘러마셨습니다.

 

이렇게 빨리 사람이 필요 없는 세상이 올 줄은 어느 누구도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4월이 시작되며 들에서는 겨우내 눈을 뒤집어쓰고 얼어있다 녹은 논갈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를 몰아 쟁기로 논을 가는 원시시대 풍경은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 찾아볼 수 없고 들에는 트랙터 소리만 종일 메아리칩니다.
6·25사변이 끝난 1950년대만 해도 이 땅의 구석구석은 조선시대 문화와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보릿고개’는 여전히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넘기 힘든 산마루였습니다. 보리는 가을 벼 베기가 끝난 뒤 심는 가을보리와 해가 바뀌어 봄이 시작되는 입춘 무렵에 심는 봄보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막 보리이삭이 패기 시작하는 4월 초가 되면 낫으로 보리이삭을 끊어다가 밀가루를 풀어서는 죽을 쑤어 둘러마셨습니다.
지금은 ‘추청쌀 아끼바레’ 보다 더 비싸게 팔리지만 밥을 먹고 숟가락 놓고 일어서면 쌀에 풀기가 없어 바로 배가 고픈 ‘알랑미’- ‘안남미’ 배급 쌀이 나돌던 시절이었습니다. 
-야! 훅! 불면 다 날아가게 생겼구나!
갤죽갤죽한 밥알은 밥그릇 안에서 따로 따로 놀았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배고픔에 시달렸기에 먹은 것이 단 한 시간이라도 더 뱃속에 오래 남아있으려면 끈기가 있는 먹을거리여야 했지요. 그래서 아침에 동이 트자마자 시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이고지고 걸어 걸어 5일장에 나가서는 자리를 잡고 한바탕 물건들을 사고팔다가 끼 때가 되면 시장끼를 달래기 위해 떡을 사먹곤 했습니다. 물 한 모금 찾아먹기도 힘든 시절 맨입에 마른 떡을 먹으니 목이 멥니다. 그러노라 신세가 처량해 또 목이 멥니다.
그 시절 어린아이였던 지금 5~60대 나이에 접어든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우리 어머니·아버지가 손톱·발톱이 닳도록 아끼고 절약해서 기른 자식들입니다. 
1960~70년대 학교에서는 하루라도 공부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해마다 꼭 공휴일인 6월 6일 현충일을 끼고 3일간 농번기 휴가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세월도 변하고 벼 품종이 개량되면서 해가 갈수록 모심는 날이 하루, 이틀씩 당겨 경기 북부지방에서는 4월 중순이 되면 벌써 논에서는 모 길이가 채 10Cm도 되지 않는 ‘통일벼’ 어린모를 모판에서 옮겨다가 모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5월 하순이면 모심기는 거의 다 끝이 나서 정작 농번기 휴가 때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시골에서 한참 모심기를 하노라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쁘고 일손이 부족하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안일을 돌보게 했습니다. 큰 아이들은 모심기를 하거나 모쟁이를 시키고 작은 아이들은 물심부름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날이 따듯한 아랫녘에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나면 논에다 보리파종을 했기에 경상도나 전라도에서는 논에 물이 나지 않는 건답-마른논이 상답이었습니다. 하지만 날이 추워 겨울에 보리가 잘 자라지 않는 경기도 지역에서는 보리를 심을 수가 없어 논바닥에서 물이 나는 물 논이 상답으로 대접을 받아 물이 나지 않는 건답에 비해 월등히 비싼 값으로 거래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농사를 지으려면 오직 언제 비가 오시나 하며 하늘만 쳐다봐야 하는 천수답이 거의 대부분인 시절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해마다 모내기철이 오면 논에 물을 대느라 물고싸움을 하다가 살인사건으로 번지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습니다. 물이 곧 생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이든 음식을 잘 먹으면 -마른 논에 물대듯 잘 들어간다는 말이 비유로 쓰일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에는 잠도 안자고 횃불을 켜들고 논에 나가서는 논에 물을 대는 물고를 지키며 밤을 지새우곤 했습니다.
흙먼지 바람이 부는 4월 초.
한낮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허기지고 배가 고프면 논두렁에 주저앉아 맨손으로 논두렁 땅을 파서는 하얀 메뿌리를 파내서 입에 넣고 씹으면 처음에는 쌉싸래하지만 한참을 씹고 나면 단맛이 우러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서면 집에는 아무도 없고 이불호청을 널어놓은 듯 하얀 봄 햇살만 마당 한가득 펼쳐져 있습니다. 마당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서 우선 목마름과 허기를 채우면 마루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습니다 -부우우우웅 하늘에는 새카만 정찰기-19 이 파란 하늘에서 맴을 돕니다. 그러다가는 비행기에서는 가끔씩 ‘삐라’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엄마가 돌아오는 발자욱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일어나서 기둥에다 매달아 둔 소쿠리에서 꺼낸 삶은 보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먹었습니다.
보리에는 밀보리와 쌀보리가 있습니다. 밀보리는 납작납작하고 검었으며 쌀보리는 좀 더 하얗고 통통했습니다. 그리고 쌀보리는 밥에 넣어먹어도 덜 깔깔했지요. 그래서 값도 더 비쌌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이면 산으로 올라가서 쑥을 캐거나 소나무 겉껍질을 낫으로 벗겨내고는 겉껍질 속에 든 하얀 송피를 걷어내서 집으로 가지고 와서는 가마솥에 넣고 풀죽을 쑤어먹었습니다. 먹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물마시듯 마시면 끝이었습니다. 씹을 것도 없었지요. 날품팔이 노동자들은 집에 봉지쌀이라도 사가지고 가기위해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종이도 귀해서 누런 ‘돌가루’ 종이 시멘트포대를 접어서 만든 봉투에 쌀 한 됫박으로 가족들에게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으로 온 세상을 얻은 것만큼 기쁨이 가득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다시 들에는 황사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卒,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jaa_yoo(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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