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정신은 늙지 않는다

평택을 상징하는
세 가지 이미지를
관광단지 조성의
주제로 정했는데
그 첫째가 지영희 선생 국악,
두 번째가 평택농악과 민요,
세 번째가 동요 ‘노을’로
평택 대표 상징이 됐습니다


 
경기도지사도 또 새로 평택시 큰 머슴이 된 평택시장도 지난 지방선거 전 평택시장이 되거나 경기도지사가 되면 ‘평택시민을 위해 실천하겠다’라고 약속한 정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평택호와 평택항을 잇는 관광단지를 개발한다는 내용입니다.
지난 해 평택시와 경기관광공사가 협약을 맺어 이미 어느 정도 작업은 진행되어지고 있고 그 내용 가운데 평택을 상징하는 세 가지 이미지를 관광단지 조성의 주제로 정했는데 그 첫째가 해금산조와 피리산조 명인이신 지영희 선생 국악, 그리고 두 번째가 평택농악과 평택민요 그 다음 마지막이 1984년 평택에서 만들어져 MBC 창작동요제에서 대상을 받아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애창동요 1위인 동요 ‘노을’입니다. 그러니까 지영희 선생 국악·평택 농악과 민요·동요 ‘노을’이 평택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습니다.
우리나라 현대국악의 개척자요, 선구자로 평택시 포승읍에서 태어난 지영희 선생님은 평생 오로지 외길 국악에 대한 사랑과 우리 전통음악을 후대까지 길이길이 전하기 위해 서울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세운 선각자이십니다.
해금연주에서 뛰어난 기량을 이룬 예술가인 지영희 선생은 후진양성과 미래의 국악을 설계하는 행정적 능력에서도 탁월한 역량을 가지고 있어 그 시절 다른 국악 예술인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분야까지 세심하게 거두며 내실을 기하는 국악이 되도록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지영희 선생이 1960년에 이룬 국악예술학교 개교는 자칫 맥이 끊길 뻔했던 우리나라 국악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가장 큰 업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국악을 현대적인 악보로 채보 한 것은 가히 조선시대 박연 선생이 이룩한 국악 업적에 필적할만한 소중한 사업이었습니다.
연주자·작곡자·편곡자·지휘자·교육자·악기제작자, 하지만 국악계에서는 지영희 선생이 무속인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지영희 선생의 여러 가지 업적을 폄훼했습니다. 1974년 아직도 우리국악계에 할 일이 많았지만 국악계 내분을 견디다 못해 지영희 선생은 부인 성금연 선생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를 합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국악계에서는 지영희 선생의 ‘중요무형문화재 제 52호 시나위’와 부인 성금연 선생의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지정을 해제합니다. 먼 타국에서도 국악발전을 위해 애쓰시던 지영희 선생은 1980년 73세를 일기로 타계하십니다.
지영희 선생이 바로 한국 국악의 큰 별이자 우리 평택의 영원한 자랑입니다. 그래서 이번 평택호 관광길에는 지영희 선생의 해금산조와 피리산조 연주를 형상화 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평택은 소사벌 넓은 들이 있어 예로부터 각가지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어 자연스럽게 농악놀이도 따라서 발전했습니다. 평택농악은 예로부터 경기·충청지역에서 이어져 내려오던 웃다리농악의 한 줄기로 특히 평택농악은 지역정서에 걸맞게 장단이 매우 빠르고, 힘차며 연주하는 동안 연주자들이 다양한 모양새로 연출해 보이는 진법이 다른 어느 지역의 농악놀이와 다르게 특이합니다. 이는 아마도 추측컨대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지던 우리나라 역사에서 전쟁을 치루며 군사들이 적과 대항해 싸우던 군대의 진법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어집니다.
평택과 불과 50리 안팎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경기도 안성 청룡사에서 유래됐다고 전하는 걸립패농악과 다르게 평택농악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백중놀이입니다. 음력 7월 보름 한창 더위에 오곡백과가 익어가기 시작할 무렵 농촌에서는 농사일로 애를 많이 쓴 농부들이 일손을 놓고 하루를 편안하게 즐기던 날이지요.
특히 평택 진위현 아전이었던 유세기 부친은 1867년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마치고 위안공연을 할 때 농악대를 이끌고 공연을 펼쳐서 ‘지위군대도방권농지기’라는 농기와 삼색 어깨띠를 하사 받았고 상쇠 김덕일에게는 ‘오위장’이라는 벼슬을 내려 진위농악의 위상을 한껏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평택호 관광길에는 흥겹고 유쾌한 농악을 소재로 해서 평택농악을 소개합니다.
지금부터 꼭 30년 전인 1984년 MBC문화방송이 주최한 제2회 MBC 창작동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매스컴’을 통해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큰 열풍을 몰고 온 동요 ‘노을’은 경기도 평택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동요입니다. 그러니까 요즈음 유행되는 시쳇말로 ‘국민동요’인 셈이지요.
그런데 지나간 30년 사이 완전히 기계화가 된 우리나라 농촌에서는 이제 더 이상 못줄을 잡고 모를 심거나 소에게 멍에를 씌워 쟁기로 논을 갈거나 하는 낫으로 벼를 베는 원시적인 농사법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허수아비도 초가지붕 둥근 박도 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동요 ‘노을’은 더욱 더 그리운 노래,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고향 같은 노래가 되었습니다.
서해바다가 가까운 덕에 평택은 다른 어느 고장보다 노을이 붉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동요 ‘노을’은 온 산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논과 밭에서 오곡백과가 노랗게 무르익어가는 풍성한 우리 평택의 너른 소사벌과 노을 진 가을 하늘과 들을 노래했습니다. 동요 ‘노을’ 노래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동요입니다. 바로 이제는 어디에 가서도 찾아볼 수 없는 5000년 역사가 담긴 우리 농촌을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卒,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jaa_yoo(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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