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의 종착은 항상 평택 발전을 위한 것
행동하던 기록으로 평택 역사자료들 보관

 
현재는 역사의 연속이며 우리는 이 순간도 역사의 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의 순간들이 모여 미래를 창조하므로 현재는 모든 미래를 담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현대인들에게는 끊임없이 깨어있는 의식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우리 가까이에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평생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변화를 일궈내기 위해 매진해 왔다는 사실은 그의 평생을 아우르는 다양한 사회운동 이력과 현재의 모습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식인은 기록을, 행동하는 자는 자료를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지. 이론과 대안을 기록으로 제시하는 지식인 집단, 아는 만큼 행동하고 그 체험에서 얻은 결과물을 통해 더 나은 것을 찾아 이야기하는 행동인 집단, 그리고 별 의식 없이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목표를 두며 살아가는 집단 말이야. 어디에나 그 세 부류는 함께 존재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가지. 그런데 문제는 이론가나 행동가가 아무리 미래를 예견하며 올바른 이론을 제시해도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데 있어. 지식인은 죽을 때 기록을 남기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죽을 때 그간의 자료들을 남기는 게 보통이지만 그 평가는 지금이 아니라 후세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현재의 섣부른 평가는 오히려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
정수일(71) 선생은 어떤 방식이든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후세들이 연구를 통해 평가할 것이라고 말한다. 현덕면이 고향인 정수일 선생은 20살에 평택군4H구락부 연합회장을 시작으로 민주회복국민회의 재야간사, 민통련 사회국장, 평택농민회 고문, 전국농민운동연합 부의장, 평택지역사회개발연구소 소장, 평택발전협의회 등 많은 일들을 했다.
실제로 그의 집 거실에는 그동안 그가 다양한 활동을 하며 모아 두었던 자료들이 빽빽하게 보관돼 있으며 평택의 어떤 역사를 대입하더라도 그에 관한 세심한 기록과 증거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어 평택역사박물관이라 칭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고향 평택을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
“1995년에 평택항이 개항하자마자 인천항운노조가 와서 일을 했지. 그런데 난 평택항은 평택사람이 운영하는 게 맞다는 생각을 했어. 그 일로도 꽤 오랜 시간 싸웠지. 처음엔 그 사람들이 평택이 독자적으로 하기엔 경험도 없고 실질적인 성과도 어렵다는 걸 내세워 인천항운노조 평택지부를 만들어 운영하다가 나중에 물동량이 늘면 그때 평택항운노조가 하는 걸로 하자는 제안도 했지만 반대가 심해지자 결국 평택 단독노조가 결성되었지”
그는 평택항이 생길 당시를 이야기하며 평택항 경계분쟁이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사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이야기한다.
“평택 3개 시·군 통합문제도 1995년에 있었는데 난 2개 군 통합에는 반대했지만 3개 시·군이 통합하는 거라면 찬성하겠다고 했어. 근소한 차이로 통합되면서 난 지역민들에게 매향인 소리를 듣기도 했지. 지역으로만 볼 때는 통합이 이로울 게 없는 게 사실이지만 반쪽짜리 통합이 되면 인구를 볼 때나 면적으로 볼 때 국가의 관심을 얻기에도 힘들고 큰 사업을 유치하기도 힘이 들기 때문에 질타를 받더라도 3개 시·군이 통합되는 게 맞다고 생각했거든”
그는 자유당 시절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인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종교인이자 사회운동가 함석헌 선생이 이승을 떠날 때까지 아끼는 제자였다. 그러나 스승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그의 일생이 투쟁의 역사였다는 건 그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며 그가 행하는 일들의 종착이 늘 ‘평택의 발전’이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투쟁의 역사, 그래도 후회 없어
“내가 하는 일들은 대부분 귀찮고 소득 없는 일이지. 욕먹는 일이 다반사고. 만약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면 난 아마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을 거야”
정수일 선생은 어렸을 때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순둥이였지만 세상이, 사회가 자신을 많이 변화시켰다는 말을 하며 잠시 말을 멈춘다.
“내 인생은 하는 족족 실패의 연속이었지. 인생 전체가 실패이기도 했어. 하지만 정수일이라는 이름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지. 때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정수일이가 맞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많았어. 비록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았어도 그런 것들이 삶의 보람이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매진할 수 있는 용기, 집안이나 아내나 자식들이 반대해도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면 가야지. 앞으로도 그럴거고”
젊어서는 건강에 대한 고마움을 몰랐으나 나이가 들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점점 자신의 몸에 대해 고마움을 깨닫는다는 정수일 선생은 어쩔 수 없이 현대의학에 의지해야 한 대도 정신적으로 이겨낼 수 있으면 이겨내겠다고 말하며 미소 짓는다.
자녀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길을 권유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이 있듯이 어떤 방향제시도 하지 않는다는 정수일 선생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오늘도 어디에선가 지역에 떠오른 현안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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