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지국, 평택역 앞에 설치
진위군 관할, 지사장 유창근

 
“사고 1. 명칭 평택지국. 1. 위치 평택역전. 1.구역 진위군 일대. 1. 직씨명 지국장 유창근, 총무 겸 기자 이명환, 회계 겸 기자 조봉행, 기자 최영수, 고문 안종철 오른쪽과 같이 자국을 설치하였사오니, 해 관내 일반인사는 일보 청구 및 광고신탁 등 일체를 직접 교섭하시압. 동아일보 백.”(『동아일보』 1926년 7월 9일)
신문은 보통 매일 또는 매주 마다 발행하는 주간신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신문은 속보성을 갖고 특징적 표제가 있다는 점에서 다른 출판물과 구별된다. 영국의 왕립언론위원회는 ‘뉴스란 그것을 읽는 대중에게 우선 흥미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신문은 사건에 대한 대중의 일시적인 흥미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식자층의 확산,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지구촌’ 시대의 여론 형성에도 기여하고 있다. 개개인은 자신과 관련된 사건에 대해 충분히 알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언론인은 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할 의무를 갖는다. 이러한 대중의 알 권리가 침해 받을 경우에는 언론인에게 더욱 막중한 책임이 부과된다.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는 <한성순보>에서 비롯된다. 이후 <한성주보>,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의 발행을 거쳐 일제강점기 3.1운동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었다. 당시 신문사는 사세를 확장하기 위해 지방에 지사(支社) 또는 분사(分社)를 설치했다. 평택의 첫 언론분국은 <동아일보> 평택분국이다. 평택분국은 수원지국에 속해 1920년 5월 6일에 설치됐다. 분국장은 유창근(柳昌根)이었다. 평택분국이 평택지국으로 승격된 것은 1926년 7월 7일이었는데, 분국이 설치된 지 거의 6년만이었다. 분국이 설치되면서 평택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들이 신문에 게재되었는데, 첫 기사가 ‘평택시가 제방공사 착착 진행 중’이었다.
<동아일보> 평택지국의 첫 지국장은 분국장으로 활동하던 유창근이었는데, 그는 신상(紳商)으로 적지 않은 재산을 모은 유지였다. 고종이 승하하자 3일간 가게 문을 닫고 휴업을 한 바 있었으며,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진위면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고문 안종철은 1919년 3월 11일 평택역 만세시위를 주도한 바 있고 이후 지역 유지로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신문사 지국은 사건사고 등을 취재하였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광고의 유치였다. 때문에 지국을 설치하면서 ‘광고 신탁’을 강조하기도 했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