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문화기우구락부’로 조직
언론 권위·민중 발전 등 도모

 
“진위군 평택에서 조선문화기우구락부 조직코자 지난 6월 23일에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던 바, 그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연기되어 지난 16일 오후 9시에 본보지국 내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유지영 씨의 사회로 강령 규약을 무사통과하였으며, 본부 상무실행위원으로 김신경, 조봉행 양씨를 선정한 후 좌기 사항을 결의하고 동 11시에 폐회하였다더라.(하략)”(『동아일보』 1927년 7월 19일)

근대이행기 신문이 발행되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자(記者)였다. 기자는 신문·잡지·방송 등의 기사를 취재하여 쓰거나 편집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이들은 생생한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때문에 이들은 기자단(記者團)을 조직하여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다. 기자단은 한말 신문이 발행되면서 중앙에서 먼저 조직되었다. 특히 3·1운동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 신문이 창간되고, 지방에 지국들이 설치됨에 따라 지방에서는 지역유지들이 기자로 활동했다. 이들 지역 신문기자들은 기자단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평택에 신문사 지국들이 설치된 것은 192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의 평택지국에서 활동하던 임승철(林承喆)·최영수(崔榮秀)·유지영(劉智榮)·조봉행(趙鳳行) 등은 “언론의 권위·민중의 발전·동업자 친목”을 목적으로 1927년 6월 18일 평택기우구락부(平澤記友俱樂部)를 창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날 창립총회를 개최하지 못하고 6월 23일로 연기를 했다가 7월 16일에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조선문화기우구락부(朝鮮文化記友俱樂部)’라는 이름으로 기자단을 조직했다. 평택기자단의 명칭은 기사마다 달랐는데, 처음에는 ‘평택기우구락부’였지만 정작 창립에서는 ‘조선문화기우구락부’라고 명명했다. 통상 ‘평택기자단’이라고 했다.
창립총회는 유지영의 사회로 강령과 규약을 통과시킨 후 상무실행위원으로 <동아일보> 평택지국 초대지국장으로 활동한 김신경(金信敬)과 기자 조봉행을 각각 선임했다. 또한 이날 창립총회에서는 전직 순사로 조직된 통영 삼구회와 일본인의 사형(私刑)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언론 권위 신장·언론기관 설치·돌발사건 조사·강연회·도서 전람회 개최·청소년운동 후원·지방미풍 장려 등을 결의했다. 흥미로운 것은 창립총회를 오후 9시에 개최하였다는 점이다. 요즘에는 주로 오전 또는 오후에 회의를 개최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늦은 저녁에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평택기자단 창립총회는 한 밤중이라고 할 수 있는 9시에 개최해 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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