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방침 등 토의, 임원 개선
위원장에 이일성, 강연도 겸해

 
“형평사 평택지부에서는 지난 21일 오후 10시 반부터 동 회관에서 임시총회서 이수안 씨 사회로 개최하고 점명하니 30여 명으로 임시집행부 의장 박평산, 서기 이수안 제씨가 피선되어 활동 방침을 토의한 후 위원을 개선하니 여좌하다더라.(하략)”(『중외일보』 1928년 7월 27일)
전근대 조선은 철저한 양반과 천민의 신분사회였다. 천민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심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도살업을 하는 ‘백정(白丁)’에 대한 차별이 더 심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백정이라는 신분적 차별이 법률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반 사회에서는 차별이 여전했다. 이와 같은 신분적 차별의 철폐를 위해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가 조직되었다. 계급의 타파, 공평한 사회의 건설, 모욕적 칭호의 폐지, 교육의 균등과 지위의 향상, 사회참여 의의의 앙양, 동지의 화목·협력·상조 등을 목적으로 창립된 형평사는 백정이라는 기록을 호적에서 삭제할 것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는 등의 활동을 하여 전국에 지사(支社) 11개소, 분사(分社) 67개소, 회원 40만 명의 대규모 운동조직으로 성장했다. 평택에도 형평사지부가 조직되었는데, 언제 조직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늦어도 1928년 상반기에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회원은 대체적으로 30여 명으로 확인된다.
평택지부의 활동은 잘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1928년 7월 21일 임시총회를 개최한 바 있는데, 지회의 활동 방침을 토의한 후 임원진을 개편했다. 이날 개편된 임원진은 위원장에 이일성(李日成) 후보에 이순만(李順萬), 서무부장에 김지영(金芝英), 부원에 길석공(吉石公) 이순석(李順錫), 경리부장에 이일만(李日萬), 부원에 이성운(李成運) 이석봉(李石峰), 교양부장에 이수안(李壽安), 부원에 이고○(李高○), 청년조직부장에 길팔설(吉八卨), 부원에 길팔천(吉八千) 등이었다. 이외에도 청년조직부원으로 5명이 더 선임되었는데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길석공은 1926년 4월 17일 형평사 안성지부 재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이수안은 형평사본부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평택지부는 임시총회에 앞서 이날 오후 8시에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이석암은 ‘형평운동의 의의’, 박평산은 ‘형평운동의 사적 전개’라는 제목으로 각각 강연했으며 성황리에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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