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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동학농민혁명·청일전쟁 120주년 특집 - 1
평택시사신문  |  ptsis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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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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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소사벌에 동학농민군 만여 명 집결하다

평택, 1860년대 동학 물결 시작·첫 동학교인 현덕면 권관리 이민도
김래현, 동학혁명 때 수원 봉기·1884년 10월 1일 남원벌에서 처형
수원유수, 1894년 평택 소사 동학군 1만여 명 주둔 보고·동학군 경계

연재 순서 >>
1 평택의 동학농민혁명
2 일본의 해외 침략 서전, 청일전쟁
3 청일전쟁 현장을 찾아서 - 1
4 청일전쟁 현장을 찾아서 - 2
5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 정세

 

‘한 갑주’는 60년이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두 갑주’가 되는 갑오년이다. 120년 전 우리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상황이었다. 흔히 ‘서세동점’과 ‘봉건 질서의 붕괴’라는 안팎의 이중적 과제가 당시 사회를 위태롭게 했다. 그러나 당시 위정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했다.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동학이 창도되었고, 마침내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운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었다. 한편 호시탐탐 조선의 침략을 노리던 일본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기도했다. <평택시사신문>은 120년 전 평택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5회 동안 본지 지면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관군(수원시사)

평택은 동학이 창도된 경주와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로 인해 동학이 창도된 지 20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전래되었다. 그렇다고 동학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동학은 1860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도되었고, 이듬해 1861년 6월부터 포교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교세가 확장되었지만 점차 충청도·경기도 지역에도 동학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수운 최제우는 이해 12월 흥해에서 접(接)을 조직하고 경기도 책임자로 김주서(金周瑞)를 접주로 임명했다. 김주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는지 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 이와는 달리 일부 기록에서는 이창선(李昌善)도 경기지역 동학 조직 책임자로 활동한 기록이 있다. 이를 본다면 경기지역에 적지 않은 동학 교세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는 평택과 안성지역으로 추정된다. 이로 볼 때 평택지역은 1860년대 초기에 이미 동학의 물결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 동학군 1만 명이 주둔했던 소사벌(소사동)

 

1860년대 초 동학의 물결 밀려오다
평택지역에 동학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이보다 20여 년 후인 1880년대 전후였다. 1880년대는 동학교단뿐만 아니라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시기였다. 1880년 고종이 개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개화파 인사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였고, 1882년에는 한국과 미국이 수교함으로써 이후 서양 열강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동학교단도 초기의 위기상황에서 벗어나 점차 안정되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1871년 ‘영해교조신원운동’으로 한때 교단 존립의 극한 상태에 이르기도 하였지만 1873년 태백산 적조암 기도를 계기로 동학의 포교가 점차 강원도 지역에서 경기도·충청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880년과 1881년에 동학의 핵심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각각 간행하였다. 동학 경전의 간행은 동학 창도 이후 끊임없이 지속되었던 관의 탄압에서도 동학교단이 새로운 차원에서 포교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경기도 지방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평택지역에서 현재 자료상 첫 동학교인으로 확인되는 인물은 이민도(李敏道)이다. 이민도는 1850년 진위군 현덕면 권관리(현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에서 태어났다. 29세 때인 1879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이후 이민도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으나 주로 평택 서남부지역과 수원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다. 왜냐하면 이민도의 출신지인 현덕면과 인근지역인 고덕면 등 평택 서남부지역의 동학교인들이 수원지역과 연계하거나 1905년 교구가 설립된 이후에도 수원교구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민도의 포교영역은 평택·수원 외에 광주(廣州)에까지 이르고 있다.
평택지역 동학 포교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김래현(金來鉉)이다. 김래현은 가선대부·상호군·관상감제조 등을 역임한 명문거족 출신이었지만 1884년 2월경 호남 출신 안교선(安敎善)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혁명 당시 수원에서 기포(起包·동학 농민 운동 때 농민들이 동학의 조직인 포(包)를 중심으로 하여 봉기(蜂起)하던 일)하였다가 안승관(安承寬)과 함께 10월 1일 새벽 남벌원에서 처형되었다. 김래현의 포교로 평택지역에서는 민공익과 민재명 부자·한흥유와 한칠성 부자·김명수와 김화덕 부자 등이 동학에 입교하였다. 이민도와 김래현의 포교활동으로 평택지역의 동학세력은 점차 조직화되었다. 1890년에 이르러 평택지역 동학 세력은 수원지역과 연합하여 조직적으로 발전하였는데, 평택에서 가장 먼저 동학에 입도한 이민도는 접주로 임명되었다. 이는 평택지역의 동학조직이 수원지역의 동학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수원지역 동학조직에 포함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수원을 중심으로 평택·안성·용인·광주 등 경기남부지역과 충남 내포지역의 아산까지 같은 연원으로써 연대를 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연원 관계로 볼 때 지리적으로 또는 인맥으로 수원이 중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893년 3월 전개한 보은 ‘척왜양창의운동’에서도 보이고 있다.

  
   
▲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수원시사)
   
▲ 용담유사(수원시사)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다
김래현과 이민도의 포교활동으로 평택과 수원 등지에서 교세를 확장한 경기지역 동학은 1892년과 1893년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교조신원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초기의 이 ‘교조신원운동’은 수원의 서병학과 서인주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892년 10월 20일경 동학교인들은 우선 공주에서 충청감사를 상대로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씻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교조신원운동은 경기지역에서 벗어나 공주에서 전개되었지만 서병학과 서인주의 연원관계에 있는 수원, 그리고 평택지역의 동학교인들이 참여하였음을 자명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 지역의 동학교인들은 이듬해 1893년 초 광화문에서 전개한 교조신원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광화문에서 전개한 교조신원운동은 김광호·박인호·손병희 등 동학교단 지도부가 중심이 되었지만, 그 지원세력은 서병학 등 경기남부지역의 동학교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공주와 광화문의 교조신원운동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지 못한 동학교단은 이해 3월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척왜양창의운동’을 전개하였다. 척왜양창의운동에는 각지의 동학교인 3만여 명이 집결하였는데, 평택지역 동학교인은 수원과 함께 참여하였다. 당시 동학교인들은 자신의 지역명을 따서 깃발을 내세웠다. 이에 따르면, 수의(水義)는 수원접에서 창의한 것을, 진의(振義)는 진위접에서 창의한 것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수원군종리원연혁’에서도 “1893년 계사 3월(음력)에 해월 최시형의 명의로 신용구·이민도 외 제씨의 주선으로 보은 장내에 수 천 인이 왕참하다”라고 했다. 이는 평택 출신 이민도와 신용구의 주도로 평택의 동학교인들은 수원지역 동학교인들과 함께 보은 척왜양창의운동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평택지역의 동학교인이 얼마나 참여하였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 수원과 기타 경기남부지역에서 참여한 상황으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취어≫에 의하면, “3월 26일 술시쯤에 수원과 용인 등의 지역에서 3백여 명이 추후에 도착하였고”, “수원접에 속한다는 사람은 겉으로는 1천여 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6백~7백 명에 불과하였는데”라고 밝히고 있고, 해산할 때는 “수원접이 840명”이라고 하였다. 평택과 인근 지역인 안성접은 3백 명, 죽산접은 4백 명 정도가 참석하였다. 이로 볼 때 평택지역 동학교인은 수원접의 1천여 명 중에서 3백~4백 명 정도가 진위접, 즉 평택지역 동학교인으로 추정된다.

 
   
▲ 김래현과 안승관의 처형기록(고종실록 31년 10월 4일, 수원시사)

소사벌에 1만 명의 동학군 주둔하다
이처럼 ‘교조신원운동’과 ‘척왜양창의운동’에 참여하였던 평택지역의 동학은 1894년 동학혁명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택지역에서 기포한 것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여러 기록을 살펴볼 때 평택지역에서 기포하거나 평택의 동학조직이 동학혁명에 참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선 평택과 연원을 같이하고 있는 수원의 동학 동향을 살펴보자 수원의 동학조직은 1894년 9월 18일 반외세의 기포령에 따라 즉시 기포하였다. 일본군이 수원의 동학지도자를 체포하려 하자 동학군은 잠시 후퇴하였지만 전열을 정비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이처럼 수원이 크게 위협받자 정부는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군을 긴급히 증파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일본군이 즉시 투입되었다. 또한 수원지역의 동학군의 활동에 대해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안승관과 김래현 등은 5천군을 거느리고 수원부를 점령하고 남쪽의 동학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바, 관군과 일본군을 만나 여러 날 싸우다가 마침내 패하였다”라고 한 바 있다.
기호대접주 안승관과 기호대접사 김래현 등이 지휘한 수원지역의 동학 조직은 5천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수원부를 점령할 정도로 기세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수원의 동학조직은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평택과 연원관계가 동일하였기 때문에 보은 척왜양창의운동과 마찬가지로 평택지역의 동학조직도 수원기포에 적극 참여하였을 것이다.
수원유수도 평택 소사(평택시 소사동)에 동학군 1만여 명이 있다고 보고하는 한편 동학군의 공격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또한 정산군 출신 김영배(金永培)는 2월 20일 서울을 출발하여 소사평(소사평야)에 이르렀는데, 이곳에서 동학군과 함께 10여 일을 머물다가 금구 원평으로 내려간 바 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보아 평택지역에서도 동학군의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밖에도 1894년 10월 16일 진위현령의 보고에도 평택읍내에 적지 않은 동학군들이 활동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이는 평택지역에서도 동학군의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또한 김래현의 연비로 동학혁명에 참여하였던 민재명(閔在明)·한칠성(韓七成)·김화덕(金化德) 등은 귀화하여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서도 평택지역의 동학지도자로 김용희(金鏞喜)와 김형식(金瀅植)을 지목하고 있는데, 이들은 9월 23일(양력) 천안에서 일본인 6명을 살해하는데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장교진(張敎鎭)·정동주(鄭東柱)·김지현(金芝鉉)·노병규(盧秉奎)·이승엽(李承曄)·이규성(李圭成)·이인수(李麟秀)·고재문(高文在)·안영식(安領植)·장인수(張仁秀)·박인훈(朴仁勳) 등은 동학혁명 이전 또는 동학혁명 시기에 동학에 입도한 인물들로, 이들 역시 동학혁명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청일전쟁의 한 중간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동학군을 진압하는데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 평택에서 활동한 동학군 대접사 김래현과 안승관 효수 장면(메사마시신문 1895년 2월 8일, 수원시사)
      

글/성주현 교수

 


■  특별기획취재단
  성주현/청암대학교 연구교수
  박성복/평택시사신문 부사장
  황수근/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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