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보다 소중한 것은 자신을 지키는 ‘자존감’이다


어찌 자신의 본분을 알지 못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눈앞에 떨어진
‘세냘꼽쟁이’ 만한 이익을 쫓아
방향을 잡지 못하며 헤매고 있는지요!
작금의 사태를 바라보며
목사님! 정말이지 슬픈 생각만 듭니다


 
목사님 안녕하셨나요? 2년 만에 다시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목사님 우리말에 ‘형보다 나은 아우가 없다’라는 말이 있지요. 그러니까 맏이가 갖는 생태적인 유전자가 다른 형제들 유전자에 비해서 월등하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래서 대체적으로 맏이는 다른 형제들 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또 사람들을 이끌어나가는 지도력이 있는 우수한 인자를 생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인가요? 하늘을 나는 날짐승이나 땅을 기는 들짐승들 모두 다 자기가 낳은 새끼들 가운데 맨 처음 눈을 뜨고 세상에 태어난 ‘첫째’를 가장 소중하게 먹이고 키워 대(代)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날짐승들은 먹이를 독차지하기 위해 연약한 형제를 밀어서 떨어뜨려 죽이기까지 하지요. 그야말로 본능적인 자기방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거의 대부분 맏아들에게 넘겨주었지요. 그래서 능력이 있는 아들은 그 재산을 잘 지키거나 많이 불려서 집안을 번창 하게도 했지만 못난 아들은 부모가 일구어서 손에 쥐어준 재산을 ‘다 말아먹고’ 거지신세가 되면서 결국 형제끼리도 재산싸움이 붙어서 ‘멱살잡이’를 넘어 원쑤지간이 되어 평생 서로 내왕도 하지 않는 사이로 비극을 만들어내곤 했지요.
목사님!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목사님과 저와는 참으로 깊고 깊은 인연을 갖고 있었지요. 목사님이 6.25 때 피난을 갔던 대구 남산동 남문교회 목회자로도 오시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목사님과 처음 만나게 되었지요.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제 큰 여동생은 그 시절 남문교회 유치원에 다녔는데 유치원 원장선생님은 바로 목사님 사모님이셨고 동생은 지금도 목사님 사모님 사진이 들어있는 유치원 졸업사진을 소중하고 간직하고 있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은 남문교회를 떠나셨고 저희가족도 대구를 떠나 서울로 돌아오면서 목사님과 이별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10여년 뒤 이두환 선배가 권해서 발을 딛게 된 평택 땅에서 다시금 목사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한창 추운 겨울날 두터운 외투에 ‘도리우찌’ 모자를 쓴 목사님에게서는 멋이 철철 넘쳐났지요.
이쯤에서 갑자기 안중근 의사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1909년 3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 ‘탕! 탕! 탕!’ 총성이 울리고 이 땅의 민족정기를 유린하고 말살한 불구대천의 원쑤 ‘이토 히로부미’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토 히로부미’가 눈을 감으며 남긴 말이 바로 ‘빠가야로’였다지요.
아시아로부터 유럽, 아메리카 대륙… 온 세계가 놀란 쾌거였습니다. 역시 일본에게 모진 수모를 당하고 있던 중국대륙 수많은 인구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침략자 원쑤놈들을 처단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역사적 사명을 바로 안중근 의사가 해내고야 만 것이지요. 그래서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아니, 앞으로 이 지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영원히 안중근 의사는 모든 인류의 추앙을 받을 것이지요.
목사님! 하지만 애석하게도 안중근 의사의 거룩한 이야기는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위인의 아들은 위대해야 한다 만일 위인의 아들이 위대하지 않다면 그것은 위인이 인형과 결혼했거나 아니면 위인의 아들이 어렸을 때 과자를 너무 많이 먹은 탓이다.
바로 미국철학자 ‘에머슨’이 남긴 말처럼 위인 안중근 의사 큰아들 안문생은 어느 날 길에서 누군가가 건네주는 과자 한 봉지를 받아서 먹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길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독살을 당한 것이었지요. 과자봉지에 눈이 팔린 위인의 큰아들, 그런데 목사님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안중근 의사 아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1939년 그러니까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지 꼭 30년이 지난 뒤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는 대중들 앞에 서서 한 사람을 부릅니다. ‘이토 히로쿠니’였지요.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큰소리로 박수를 쳤습니다. ‘이토 히로쿠니’ 바로 안중근 의사 손에 죽은 ‘이토 히로부미’ 아들이었습니다. ‘미나미’는 다시 한 사람을 더 불렀습니다. ‘안준생’ 그가 바로 위인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입니다. 사람들은 더 큰 박수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무대에 오른 안준생은 ‘이토 히로쿠니’ 앞으로 다가가서 두 손을 내밀고 ‘이토 히로쿠니’에게 마치 지난 날 자신의 부친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죽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사죄를 대신하는 듯 머리를 숙였습니다. 국권을 잃었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치욕의 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전자전(父傳子傳)’은 틀린 말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지요. 다른 일은 다 차치하고라도 어느 누구에게든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이거나 남을 멸시하거나 돌아서서 흉을 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 보다 더 훌륭한 것은 목사님은 결단코 물질이나 지위를 탐하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오랜 기간 수많은 학생들에게 하늘사랑을 알려주셨던 목사님은 결국 ‘용인(傭人)’ 신분으로 갖은 모함과 수모를 당하며 정든 학교와 사랑하는 학생들 곁을 떠나면서도 그들을 모두 용서하셨고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목사님! 닭은 알을 낳아 병아리가 태어나고 용(龍)은 용(龍)을 낳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 이치이지요. 그런데 어찌 자신의 본분을 알지 못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눈앞에 떨어진 ‘세냘꼽쟁이’ 만한 이익을 쫓아 방향을 잡지 못하며 헤매고 있는지요! 작금의 사태를 바라보며 목사님! 정말이지 슬픈 생각만 듭니다.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卒,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jaa_yoo(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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