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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동학농민혁명·청일전쟁 120주년 특집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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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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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국가로 성장한 일본, 해외 첫 침략전쟁 일으키다

조선정부의 청군 파병 의뢰, 조선·청나라·일본 삼국 관계로 확대
동학군 전주성 점령, 청일 양 나라 군사 출병이 전쟁 도화선 돼
일본의 본격적 청일전쟁은 조선왕궁을 침입하는 순간부터 시작

연재 순서 >>
1 평택의 동학농민혁명
2 일본의 해외 침략 서전, 청일전쟁
3 청일전쟁 현장을 찾아서 - 1
4 청일전쟁 현장을 찾아서 - 2
5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 정세

   
▲ 일본군 대본영이 위치한 히로시마성
‘한 갑주’는 60년이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두 갑주’가 되는 갑오년이다. 120년 전 우리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상황이었다. 흔히 ‘서세동점’과 ‘봉건 질서의 붕괴’라는 안팎의 이중적 과제가 당시 사회를 위태롭게 했다. 그러나 당시 위정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했다.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동학이 창도되었고, 마침내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운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었다. 한편 호시탐탐 조선의 침략을 노리던 일본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기도했다.  <평택시사신문>은 120년 전 평택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5회 동안 본지 지면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120년 전 평택 일대는 전쟁(戰爭)의 현장이었다. 평택 소사벌에 주둔한 일본군과 성환에 주둔한 청나라군이 1894년 7월 28일 저녁 소사벌 앞을 흐르는 안성천 안성나루(安城渡) 근처에서 첫 총성을 울렸다. 이후 전개된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동아시아의 대변화를 이끈 청일전쟁은 전장(戰場)이었던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우선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를 이룩하였지만 해외침략으로 한국과 중국 양국에 불행을 안겨주었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중심이라는 자존심이 한 순간에 무너졌으며, 한국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가 가속화되었다. 동아시아의 지형을 변화시킨 청일전쟁, 그 상황을 청일전쟁을 치룰 수밖에 없었던 당시 일본의 동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철저하게 준비한 일본, 전쟁에서 승리하다
청일전쟁은 1894년 7월 28일 소사벌전투부터 11월 22일 중국 뤼순전투(旅順戰鬪)까지 4개월 정도 진행되었다. 첫 전투가 평택일대의 소사벌 안성나루 일대였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전쟁을 일으켰는가 하는 점이다.
1894년 1월 10일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초기에는 국내 문제였지만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원군 파병을 요청하면서 국제적인 문제로 전환되었다. 조선정부는 관군으로만 동학군을 진압하는데 한계를 느끼자 동학군이 요구하는 변화와 개혁을 수용하기보다는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에 동학군 진압을 위한 파병을 요청했다. 당시 청군의 파병 요청에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요청이 이뤄졌던 것이다. 청군 파병 요청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청나라와 일본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일어난 갑신정변을 계기로 1885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은 바 있는데, 이 조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84년 조선의 갑신정변이 청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간 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2개 대대의 병력을 조선에 파견했다. 그리고 양국 간의 무력충돌의 위험이 커졌다는 명분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전권대사로 톈진에 보내 리헝창(李鴻章)과 담판을 지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보하려고 했다. 그 결과 1885년 4월 전문 3개조의 ‘톈진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주요내용을 보면 첫째 청일 양군은 4개월 이내에 조선에서 철병할 것, 둘째 조선 국왕에게 권해 조선의 자위군을 양성하도록 하되, 훈련교관은 청일 양 당사국 이외의 나라에서 초빙하도록 할 것, 셋째 조선에서 이후 변란이나 중요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두 나라 또는 어느 한 나라가 파병할 때는 먼저 문서로 연락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철병할 것 등이다. 이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갑신정변 실패 후의 열세를 만회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자 했다. 특히 세 번째 조항이 청일전쟁과 직접적인 조항으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조선정부의 청군 파병 요청은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넘어선 삼국 간의 관계로 확대되었다.

일본 군부에서 개전론을 확산시키다
동학농민혁명과 조선정부의 청군 파병 요청을 확인한 일본은 두 가지 반향이었다. 외교계는 러시아의 개입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청일은 협력하여 조선 내정을 개혁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은 동학농민혁명을 방해할 것이라고 하여 청일전쟁을 반대했다. 이에 비해 군부는 전략 요충인 조선을 사전에 확보하기 위해 빠른 기회에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은 이미 1887년 <청국정토책안(淸國征討策案)>으로 완성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일본은 철저하게 청일전쟁을 준비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일본 군부는 조선정부가 지금과 같은 정세에서는 반드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고 청나라는 이에 응할 것이라 판단하고, ‘조선에 있는 신민(일본인)을 보호하고 일본 제국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군사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다. 특히 오토리(大鳥圭介) 주재조선공사는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한다면 ‘대단히 기뻐해야 할 기회’이며 ‘동양 정계의 일대 신천지’를 열 수 있고, 일본은 청나라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고 이를 기회로 조선정부를 혁신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확보하겠다는 의지였다.
5월 31일,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정부는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청군 출병을 의뢰했다. 이 출병 의뢰가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청군 출병 의뢰는 즉각 일본정부에 타전되었고, 6월 2일 일본도 각의에서 ‘지금 상세한 보고를 기다릴 것 없이 먼저 공사관 및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기선을 잡는데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즉시 출병 준비를 해야 한다’는 출병결의안을 채택했다. 뿐만 아니라 청군의 병력이 5000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양국 간 전쟁에서 일본이 필승하기 위해서는 6000명이나 7000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가볍게 이긴 후 후환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청나라가 출병을 촉진하도록 유도하기까지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6월 3일 조선정부는 공식적으로 청군 출병을 청원했다. 이에 철저한 준비를 마친 일본도 즉시 군사를 조선으로 파견키로 했다.

   
▲ 경복궁을 점령하는 일본군

일본군 히로시마 우지나항에서 첫 출병하다
6월 5일, 일본은 청일전쟁을 대비하여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을 개설하고 혼성여단의 조선 파견에 대한 허락을 받아 히로시마(廣島)의 제5사단에 1차 충원을 하달했다. 6월 8일 선발대로 800여 명의 대대 병력은 히로시마 우지나항(宇品港)에서 인천으로 출항했다. 6월 9일 인천에 도착한 오토리 공사는 조선정부로부터 병력을 대동하지 말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다음날 10일 해군 육전대 420명과 함께 서울로 들어왔다. 이와 같은 시기 청군 2100명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8일부터 12일까지 충남 아산에 상륙하고 충청도 일대에 주둔했다.
청나라와 일본에서 군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들은 동학군은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6월 10일 정부와 전주에서 화약을 체결했다. 이를 ‘전주화약(全州和約)’이라고 한다. ‘전주화약’ 후 조선정부는 청일 양군의 공동철병을 요구했다. 청나라는 이를 수용하였지만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철병안을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대본영은 제5사단의 잔여부대를 동원하여 조선에 출병할 것을 결정했다. 이처럼 일본이 철병을 거부하고 오히려 추가 출병한 것은 일본군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또 어디에도 가지 않고 결국 그곳에서 빈손으로 귀국하기에 이른다면 심히 체면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또한 실정(失政)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조선의 지배권을 확보하려고 했는데 빈손으로 귀국한다면 정부에 대한 비판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언론은 이 같은 분위기에 적극 동참했다. “관병식을 위해 조선에 출병하지 않았다”던가 “대본영을 설치한 후 최초의 출병인데 아무 이득도 없지 철병한다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일본 병력이 우세하기 때문에 철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공동철병 거부와 추가 출병은 청일전쟁으로 치닫는 막다른 길이었다. 결국 일본은 6월 16일 조선정부의 공동개혁을 제안했고, 6월 21일 청나라는 이를 거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날 톈진에 있던 한 일본 무관은 “청나라가 조선에 5000명의 병력을 증파한다”는 거짓 정보를 본국에 급전했다. 이를 기회로 일본은 양국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고 확신하고 6월 22일 일본 단독으로 조선정부를 개혁하기로 했다. 이어 23일 대본영은 출병을 연기했던 2대대를 조선에 증파하고 아산에 있는 청군을 분쇄할 능력이 있는 혼성여단을 완성할 것을 제5사단에 하달했다. 당시 일본 무쓰(陸奧宗光) 외상은 청일전쟁의 구실을 ‘명백한 청나라와 조선의 종속관계 파기’에 두었다. 6월 24일 혼성여단은 인천을 거쳐 서울로 향하였고, 인천과 서울 간은 일본군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러한 급변한 청일 양국의 개전에 대해 러시아와 영국 등 서양세력은 중립적 자세를 취하였다. 이는 결국 일본의 개전을 확실하게 지원하는 꼴이 되었다.
   
▲ 청일전쟁을 일으키는데 역할을 한 주재조선공사 오토리

조선왕궁 경복궁 침입, 청일전쟁 시작되다
7월 17일 일본 어전회의에서 청일전쟁은 이미 되돌릴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에 대본영은 “해전에서 대승하고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경우 육군은 장정하여 북경을 돌입한다”는 등 전쟁 전략 계획을 수립했다. 7월 22일 대본영은 연합부대를 편성하고 해군중장을 사령관을 임명한 뒤, “귀관은 연합함대를 이끌고 조선국 서안의 해안을 제압하고 풍도 혹은 안면도 부근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이어 23일 이른 새벽 미명을 틈타 왕궁인 경복궁을 침입, 저항하는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당시 일본은 조선군을 ‘적군(敵軍)’으로 취급하였다. 이는 조선을 ‘점령’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일본의 본격적인 청일전쟁은 조선왕궁을 침입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날 오전 11시 연합함대의 선발대들이 사세보(佐世保) 군항을 출발 군산으로 출격했다. 한편 7월 25일 서울을 출발한 혼성여단은 수원, 진위(振威)를 거쳐 28일 소사벌에 주둔했다. 이날 저녁 안성천 안성나루에서 총성이 울리면서 청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해외 침략전쟁은 시작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평택에는 ‘평택이 무너지나 아산이 깨지나’라는 말이 전해지게 되었다.    

   
▲ 청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설치한 대본영의 표지석
              
글/성주현 교수

■  특별기획취재단
  성주현/청암대학교 연구교수
  박성복/평택시사신문 부사장
  황수근/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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