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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동학농민혁명·청일전쟁 120주년 특집 - 3
평택시사신문  |  ptsis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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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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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흔적 청일전쟁 전진기지, 일본 히로시마 대본영을 가다

대본영은 일본제국 육군·해군 최고 통수기관, 청일전쟁 때 설치
히로시마평화대공원, 일본을 가해자 아닌 피해자 입장에서 전시
우지나 구항, 일본의 해외 침략전쟁 첫 발 내딛은 전장의 현장

 

 

연재 순서 >>
1 평택의 동학농민혁명
2 일본의 해외 침략 서전, 청일전쟁
3 청일전쟁 현장을 찾아서 - 1
4 청일전쟁 현장을 찾아서 - 2
5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 정세

   
▲ 군항에서 어항으로 전락한 우지나 구항, 일본이 해외침략의 첫 군대를 파견한 곳이다
   
▲ 청일전쟁 당시 설치됐던 대본영 터
‘한 갑주’는 60년이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두 갑주’가 되는 갑오년이다. 120년 전 우리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상황이었다. 흔히 ‘서세동점’과 ‘봉건 질서의 붕괴’라는 안팎의 이중적 과제가 당시 사회를 위태롭게 했다. 그러나 당시 위정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했다.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동학이 창도되었고, 마침내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운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었다. 한편 호시탐탐 조선의 침략을 노리던 일본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기도했다. <평택시사신문>은 120년 전 평택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5회 동안 본지 지면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지형을 변화시킨 일대의 사건이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근대국민국가를 달성한 일본은 동아시아의 모범이 되었지만 1894년 청일전쟁→1904년 러일전쟁→1931년 만주사변→1937년 중일전쟁→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국가로 전락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첫 해외 침략전쟁인 청일전쟁은 우리나라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지난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강화하고 청나라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했다.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리헝창(李鴻章)은 현 상황에서 일본과 전쟁을 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전쟁을 피하는 피전책(避戰策)을 주장했다. 그러나 왕당파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정쟁(政爭)의 수단으로 삼아 결국 청일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틈바구니에 낀 한국은 두 나라의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개된 청일전쟁은 일본에서 근대화의 상징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일전쟁의 현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 속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이번호에서는 청일전쟁의 현장인 일본 히로시마(廣島)를 살펴본다.

   
▲ 청일전쟁 당시 대본영으로 사용됐던 히로시마 진대사령부 본관
청일전쟁 전진기지, 히로시마 대본영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군부(軍部)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청나라와 전쟁을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것이 바로 대본영(大本營) 설치였다. 대본영은 일본어로 ‘다이혼에이(だいほんえい)’라고 한다. 대본영은 전시 또는 사변이 발발할 때 설치된 일본 제국 육군과 해군의 최고 통수기관이다. 일본 천황의 칙령(勅令·명령)을 대본영 명령으로 반포하는 최고 사령부로서의 기능을 가진 기관이다. 따라서 전시체제에서는 육군과 해군을 지배하에 두는 천황 직속의 최고 기관이었다. 대본영이 설치된 것은 첫 해외침략전쟁인 청일전쟁 때였다.
대본영은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893년 5월 19일 ‘칙령 제52호’의 ‘전시 대본영 조례’에 의해 법제화되었다. 이 조례에 의해 대본영은 청일전쟁이 본격화되는 1894년 6월 5일에 설치되었다. 대본영이 설치된 이날 일본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을 파견했다.
대본영은 설치된 초기에는 도쿄(東京)에 있었지만 청일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9월 15일 히로시마(廣島)로 옮겼다. 대본영을 히로시마로 옮긴 이유는 전장(戰場)인 조선과 가깝고, 산요(山陽) 철도(현 산요 본선)가 1894년 6월 히로시마까지 연장되었으며, 우지나(宇品) 항(현 히로시마 항)이 1889년 대형선박이 정박할 수 있게 정비되어 교통이 비교적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히로시마로 이동한 대본영은 히로시마성에 설치되었다.
모모야마(桃山) 시대의 건축 양식인 히로시마성은 축성 당시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천수각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전국시대의 다이묘(大名)이자 추우고쿠(中國) 지방을 지배하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손자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하의 한사람으로 알려진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쌓아 올린 성이다. 아성(牙城)의 망루를 비롯한 누문 등 91개의 건축물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성이었지만,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에 의해 아성의 망루 외에 모두 붕괴되었다. 히로시마성 안에 전국 여섯 개 진대(鎭臺) 중 하나가 설치되면서 히로시마는 군사도시로 발전했다. 특히 보병 제11연대와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 등이 성내에 설치되었는데, 훗날 침략전쟁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히로시마성은 일본의 성이 대부분 그렇듯이 평지의 낮은 언덕에 세워져 있다. 성내에는 호국신사(護國神社)가 자리 잡고 있다. 호국신사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신사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침략전쟁의 전범들을 함께 기리는 곳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도쿄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의미와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 청일전쟁 당시 히로시마성에 대본영이 설치되었음을 알려주는 현판

호국신사를 보고 있자니 뭔가 목에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호국신사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정갈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왠지 씁쓸함이 지워지지 않았다. 호국신사 앞 잔디밭에는 ‘사적 히로시마성 유적’ 안내판이 성의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 그 옆에는 히로시마성의 연혁을 알려주는 안내석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호국신사를 지나 오른쪽으로 따라 올라가면 바로 대본영이 있던 현장이다. 원래 대본영은 일본 천황이 머물던 곳이지만 지금은 기단만 남아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완전히 무너졌다. 전쟁의 참화를 일으켰던 현장이 참화의 모습으로 을씨년스럽게 흉한 모습 그대로였다. 대본영 터 앞쪽의 ‘메이지 27,8년 전역 히로시마 대본영(明治二七八年戰役廣島大本營)’이라는 안내비가 있어 여기가 대본영임을 말해주었다.

   
▲ 히로시마평화대공원과 자료관, 자료관에는 일본이 원폭 피해국임을 강조하고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히로시마평화대공원
대본영을 설명해주는 안내판에는 1894년 9월 14일부터 이듬해 1895년 4월 27일까지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이 머물렀다고 한다. 바로 청일전쟁이 한창인 당시 이곳에서 직접 침략전쟁을 지휘했던 것이다. 원폭 피해로 흔적만 남은 대본영 터는 그야말로 옛 영화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피해자의 모습만 남아 있었다. 이는 일본이 침략국이 아니라 전쟁에서 피해를 받은 나라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뀐 순간이었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돌기단과 듬성듬성한 잔디만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대본영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히로시마성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천수각(天壽閣)이 옛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천수각 역시 원폭으로 허물어졌었지만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천수각에는 히로시마성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는데, 그중에 청일전쟁 당시의 대본영을 알려주는 현판이 눈에 띄었다. 마음이 움찔했다.
히로시마 대본영이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히로시마평화대공원이 있다. 평화로워 보이는 대공원 안에는 자료관이 있는데, 이 역시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전시물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자료를 전시한 것이다. 침략자로서의 사진은 ‘조선인·중국인 등 강제연행’이라는 설명문이 고작이었다. 자료관을 보고 있노라면 ‘옛 일본의 영광과 원폭의 피해국 일본’만 연상되었다. 이웃나라를 배려한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일본의 양면성을 보는 듯 했다.

   
▲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이 처음으로 출병한 우지나항 모습
첫 해외침략의 현장 우지나항
현재는 히로시마항으로 알려진 우지나항은 청일전쟁에 앞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일본군이 첫 출항한 곳이다. 우리나라와 일본 본토와 가장 가까운 곳은 규슈(九州)의 나고야(名護屋)였다. 나고야는 임진왜란 당시 조신침략 전진기지로 활용되었다. 청일전쟁 때에도 이곳을 활용할 수 있었지만, 군수물자를 나를 수 있는 도쿄에서 이어지는 철도가 부설된 우지나항이 전쟁의 전진기지로 더 활용가치가 있었다. 때문에 히로시마에 대본영이 설치되었고, 우지나항에서 첫 일본군이 파견되었던 것이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된 일본군은 오히려 청일전쟁에 투입되었다. 이들 일본군은 평택 안성나루 전투와 성환전투·평양전투를 치른 후 압록강을 건너 청국으로 침략해 들어갔다.
우지나항은 신항과 구항이 있다. 특별기획취재단은 처음에 신항을 중심으로 돌아보았지만 뭔가 모르게 느낌이 와 닿지 않았다. 신항 오른쪽에 허름하고 무질서하게 널려있는 배와 낚시꾼이 있는 구항이 있다. 우지나 구항이 해외 침략전쟁의 첫 발을 내딛은 전장의 현장이었다. 당시 우지나항에 모인 군인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와 군화소리만 들려오지 않을 뿐 옛 역사의 모습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선들만 들락거리는 한가로운 항구로 전락했지만 청일전쟁 당시에는 가장 많은 군인들이 전장으로 떠나는 군항이었다.
침략전쟁의 전진기지였던 히로시마는 그 모습을 감춘 채 취재진을 맞이했다.               
글/성주현 교수

■  특별기획취재단
  성주현/청암대학교 연구교수
  박성복/평택시사신문 부사장
  황수근/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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