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학예사를 배치하고 ‘시사편찬위원회’를 상설화하여
장기간 사료를 수집해 연구서를 편찬해야 한다.
이번 시사와 같은 목적과 방식대로 제3의 <평택시사>가 편찬되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것은 평택시민에 대한 모독이며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세상에 간 큰 사람이 있다. 바로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이 주변사람들에게 또는 후대에 평가 받는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사람에게는 ‘자성(自省)’이란 게 없다. 그렇게 돈과 권력에 취해 세상을 살다보면 죽을 때 ‘아차’하고 후회하게 된다.

중국 한나라의 역사가 사마천은 한무제의 압력 앞에서도 직필(直筆)만을 고집하다가 궁형(宮刑)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필을 멈추지 않아 후대 역사가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조선은 사마천의 역사의식을 모범으로 삼았다. 그래서 춘추관과 승정원에 사관(史官)을 배치하고 왕과 각 기관에서 이뤄지는 일들을 낱낱이 기록하였으며, 역사 편찬에 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고도 왕과 권력자들의 개입을 철저하게 막아 후대의 엄정한 평가와 교훈이 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의식이 바탕이 된 정사(正史)가 조선왕조실록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은 오늘날에도 조선시대 연구의 기본서이며 가장 객관적인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지난 7월 말 드디어 <평택시사平澤市史>가 편찬되었다. 이번 시사市史는 ‘드디어’라는 수사를 붙여야 할 만큼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 도시의 역사를 종합하여 편찬하는 일이 그리 녹록치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이번 <평택시사> 편찬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첫째, 정사正史 편찬에 대한 인식문제다. 국가나 도시의 정사正史는 그 시대 역사의식의 정수이며 최고의 객관성을 담보해야 한다. 그래서 정권의 필요성을 배제하고 역사적 필요성이나 일정한 기간을 두고 편찬하는 것이 상례다. 또 편찬을 할 때는 그동안의 모든 연구 성과와 사료를 최대한 모으고 집필해야 한다. 이번 <평택시사>는 편찬의 이유와 목적을 제대로 논의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추진되었다. 또한 ‘2001년 시사市史의 증보판’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편찬이 추진되면서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렸다.

둘째, 편찬기간과 예산편성의 문제다. 평택시사의 경우 짧은 편찬기간에 타 지자체의 3분의 1에 불과한 예산으로 사업이 진행되었다. 예산이 부족하면 상임위원들의 급여나 출판비 부족으로도 나타나지만 무엇보다도 분야별 최고의 집필진을 편성할 수 없게 된다. 물론 부족한 예산에서도 이정도의 집필진을 편성하고 양질의 원고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깝지만, 그 이면에는 상임위원들의 간청과 집필진들의 희생과 양보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셋째, 연구 성과 축적에 대한 인식부족이다. 서울시의 경우 시사편찬을 위해 ‘시사편찬위원회’를 상설화하고 전문가를 채용하여 십 수 년 동안 분야 별 사료史料 축적과 연구 성과들을 만들어냈다. 최근 간행된 <수원시사>도 6년 가까운 긴 시간동안 사료집을 간행하고 200여 명의 전문연구자들을 집필진으로 초빙한 결과 20권이라는 방대한 걸작을 편찬할 수 있었다.

평택시는 타 지자체의 사례를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평택시 문예관광과 내에 전문학예사를 배치하여 시사편찬의 전 기간을 컨트롤하고, ‘시사편찬위원회’를 상설화하여 장기간 사료를 수집해 연구서를 편찬케 하는 제도적 개선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필자는 이번 시사편찬을 축하한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관계자들의 노고에도 격려와 감사를 드린다. 사실 기대이상의 시사편찬은 모두 이들의 공功이다. 하지만 이번 시사편찬과 같은 목적과 방식대로 제3의 <평택시사>가 편찬되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것은 평택시민에 대한 모독이며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 김해규 소장
     평택지역문화연구소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