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의 생각이 배제된 농촌의 현실이 무시된농업의 미래를 압류한 정책들에
예산을 아무리 쏟아 부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냔 말이다.
이따위 국가의 일방적인 허용된 폭력이 있는 한
쌀 자급, 식량주권의 실현은 어려워 보인다

 

 완장(腕章)은 크든 작든 권력으로 상징된다. 권력은 폭력을 동반한다. 완장은 붉은 완장을 연상한다. 혁명 빨치산의 붉은 완장은 프롤레타리아권력을 상징했다. 해방공간이 그랬고 한국전쟁당시 인공치하가 그랬다. 그 앞에선 인간의 존엄이나 자주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어린 날 학교에서도 노란완장을 주었다. 교문에 버티고 서서 딱지를 뺏거나 구술을 압수하기도 했다. 완장의 폭력 앞에 우리는 늘 무력했다. 완장의 권력은 허용된 폭력에 다름 아니다. 중학교·고등학교 때 완장폭력은 무시무시하기까지 했다.

지난 시절 검은 띠가 두 줄 그어진 노란 바탕에 ‘지도’라고 쓰인 완장이 설친 때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로 정권의 정통성이 결여돼있었다. 따라서 국민들에게 뭔가를 보여 줘야 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보릿고개를 없애는 일이었다. 식량을 축내는 쥐잡기 운동, 건강에 좋은 혼·분식 장려, 쌀 막걸리 금지, 농촌엔 적게 잡아서 촘촘히 심는 소주밀식, 마른 논에는 볍씨를 바로 뿌리는 건답직파가 구호로 내걸렸다. 농민들이 그 말을 이해하기ㄲK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중 백미는 ‘통일벼정책’이다. 노란 완장은 통일벼 모판인지 아닌지 살펴보고 누구나 통일벼를 심으라 했다. 녹색혁명은 폭력의 결과물인 셈이다. 목표는 달성했지만 과정의 폭력성은 전근대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에 다르지 않다. 나열한 모든 정책이 가히 폭력적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아버지의 모판을 짓이겨 놓은 노란완장의 ‘지도’는 엄청난 권력을 누렸고 그 폭력 앞에 꼼짝 못하는 아버지의 무력한 모습에서 필자는 폭력의 잔인함을 느껴야만 했다.

보릿고개는 폭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문민정부에서 교육부장관을 지낸 김숙희 교수는 한 사석에서 영양학자로서 혼식과 분식이 쌀밥보다 영양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해 박정희의 미움을 샀노라고 했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잡아넣겠다는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며 웃었다. 자신은 학자로서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그때도 혼·분식이 영양적으로 좋다고 곡학아세하는 학자들이 권력의 폭력을 조장했다. 4대강 사업의 자연에 대한 폭력에도 양심 없는 학자들이 앞장섰던 것처럼 말이다.

쌀 개방 선언을 눈 한 번 꿈쩍하지 않고 해내는 정부도 보면 뒤에서 학자니, 전문가니 하면서 개방을 당연시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부의 입장을 만들어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다. 이들은 기업의 논리를 팔고 다니며 생명의 논리를 짓이겨 버린다. 이들은 자본의 논리를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재주를 부린다. 물론 그 대가로 또 다른 인센티브가 따라 붙는다.

그들에 의해 농민들에게 돌아오는 폭력은 완강하다. 그들에게 채워진 완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완강하다. 농민들은 이런 폭력에 20년 동안 하도 맞아서 맷집이 생겼는지 ‘이젠 칠 테면 쳐봐라’ 하는 식으로 눈만 껌뻑이며 죽을 날을 기다린다. 이게 뭔가 싶다.

농민들의 생각이 배제된, 농촌의 현실이 무시된, 농업의 미래를 압류한 정책들에 예산을 아무리 쏟아 부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냔 말이다. 이따위 국가의 일방적인 허용된 폭력이 있는 한 쌀 자급, 식량주권의 실현은 어려워 보인다.

▲ 한도숙 지부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평택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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