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을 지키는 사람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팔자와 운명은 바뀝니다.
그러기에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나’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이어가는 인연을 다시 생각합니다

 

  

평택에 발을 들여놓은 지 40여년 그리고 평택을 떠난 지 20여년.

하지만 아직도 평택과 엮인 인연은 질기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평택은 그리운 땅 그립고 그리운 사람들이 사는 고장입니다.

지난 2008년 느닷없이 당시 평택문화원 박성복 사무국장이 누거(陋居)를 찾았습니다.

오랜 시간 모른 척 잊고 지냈던 평택이었습니다. 박성복 국장을 만나면서 다시 낯익은 평택을 드나들게 되었고 박 국장 손에서 시작되어진 동요 ‘노을’ 이야기는 2010년 제1회 전국 ‘노을’ 동요제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평택시사신문’에서도 여전히 동요 ‘노을’ 이야기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시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한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쉬 지칠 일입니다. 돈이 생기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동요 ‘노을’ 노래가 만들어진지 30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4월에는 ‘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라는 제목을 달고 ‘봄봄출판사’에서 동요 ‘노을’ 책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자 박성복 국장은 동요 ‘노을’ 책에 그려진 그림으로 평택 곳곳에서 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고 지금 ‘평택시사신문사’ 주최로 준비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노을’을 평택 대표 ‘브랜드’로 만드는 일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은데 그 후속 조치들이 쉽지는 않네요. 그렇지요. 세상에 쉬운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박성복 국장님의 동요 ‘노을’ 사랑과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2008년 평택을 다시 드나들면서 평택시립도서관을 찾은 어느 날 김용래 도서관장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당시 김용래 도서관장은 다른 사람들이 가기 꺼려하는 한직(閑職) 중의 한직인 평택시립도서관장 자리를 3년째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용래 도서관장은 관공서를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 쯤은 이맛살을 찌푸렸을 공무원의 불친절과 고자세(高姿勢)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부드럽고 친절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쳇말로 ‘머리에 털 나고 나서’ 처음 만나는 ‘사람의 도리와 예의·염치’를 아는 공무원이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닙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이런 공무원도 다 있나!? 혹시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거 아니야?’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도서관장실은 언제나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열린 사랑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하늘이 내리는 변화에 따라 평택시 본청 주요부서 몇 군데를 옮겨 다녔습니다. 얼마 전 평택을 찾았던 날 일을 보고 도서관엘 잠시 들렸더니 김용래 국장이 평택시의회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고 안부를 전했습니다.

‘군자지중용야(君子之中庸也) 군자이시중(君子而時中)’. ‘군자가 진정 군자인 것은 바로 때(時)를 아는 일이다. 군자는 설 자리와 앉을 자리를 구분할 줄 알아 처신을 하는 일이다’라는 공자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평택시의회 김용래 사무국장.

지난 ‘4월 16일’ 이후 나라 안에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이즈음 자리에 연연하다가 ‘서야 할 자리’와 ‘앉아야 할 자리’를 구분하지 못해 결국 손가락질을 피할 길 없어 초라하게 물러난 자칭 ‘지식인’이라고 떠벌이던 총리 후보자들을 다시 생각하며 김용래 국장님의 용신(用身)에 머리를 숙입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많은 인쇄물을 찍어내던 ‘삼화인쇄소’가 있었습니다. 을지로 2가, 지금 명동 외환은행 본점 길 건너편에 있던 삼화인쇄소를 지나가다 보면 인쇄물을 찍어낼 때 쓸 종이 두루마리가 항상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그 삼화인쇄소 사장네 코딱지만 한 한옥 기와집이 바로 친구 신극설 군(君) 집 아래에 있었지요.

얼마가 지나자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우리 귀에도 삼화인쇄소가 번창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정말이었던가? 바로 삼화인쇄소 사장네는 그 동네를 떠나 어디론가 이사를 갔습니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 집은 어느 누구도 살 지 않는 빈집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번 집은 팔지 않는다’, ‘그 집을 팔면 복(福)이 달아난다’는 속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판단과 결정은 어쩌면 어려웠던 지나간 시간을 잊지 않으려는 ‘수구초심’, ‘자기다짐’이기도 할 것입니다.

세상 속에는 분명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렇고 사람과 땅 사이도 그렇고 사람과 직장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택과 가까운 안성 명륜여중과 안청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 1978년 한광여고 미술교사로 자리를 옮겨와 1994년까지 오랜 시간 재직했던 김영배 선생도 많은 후학들을 가르치며 평택이 잊을 수 없는 인연을 남겼습니다.

1999년 여름 제자가 운전하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김영배 선생은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인해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늘 가까운 거리에서 오고가던 제자였습니다. 애써 제자의 앞길까지 열어준 남다른 인연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두 사람은 그만 악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팔자’와 운명은 바뀝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언제, 어느 땅에서 태어났느냐’도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꿉니다.

사람과 사람이 이어가는 인연을 다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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