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청일전쟁 유적지,
새롭게 조명·교육 현장으로 승화시키자


‘동학농민혁명’·‘청일전쟁’ 발발 120년, 당시 상황은 여전히 유효
<평택시사신문> 특별기획 계기로 평택 팽성 ‘추팔리전투’ 확인
그동안 잊히고 버려졌던 청일전쟁의 현장 올바르게 조명 필요

연재 순서 >>
1 평택의 동학농민혁명
2 일본의 해외 침략 서전, 청일전쟁
3 청일전쟁 현장을 찾아서 - 1
4 청일전쟁 현장을 찾아서 - 2
5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 정세

 

 

▲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조선풍경 일청전쟁명소 안성천 평택교와 농민’/박성복 소장
‘한 갑주’는 60년이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두 갑주’가 되는 갑오년이다. 120년 전 우리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상황이었다. 흔히 ‘서세동점’과 ‘봉건 질서의 붕괴’라는 안팎의 이중적 과제가 당시 사회를 위태롭게 했다. 그러나 당시 위정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했다.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동학이 창도되었고, 마침내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운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었다. 한편 호시탐탐 조선의 침략을 노리던 일본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기도했다. <평택시사신문>은 120년 전 평택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5회 동안 본지 지면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지 120년이 되었다. 그러나 1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황은 여전히 유효하다.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패전한 후 ‘평화헌법’을 제정했다. ‘평화헌법’은 비록 미국이라는 타의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전쟁의 당사자’라는 책임이 뒤따랐기 때문에 그동안 이를 충실히 유지해왔다. 그런데 최근 아베(安培) 수상을 정점으로 한 일본 정권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발상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드세게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8월 15일 패전일에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물품을 봉납했던 아베 수상은 위안부 부정, 독도의 일본 영토화를 중요한 정책의 하나로 자리매김 해놓았다. 이는 결국 한·일 관계에서 가장 큰 이슈로 자리 잡았고, 앞으로의 한·일 관계에도 가장 부적절한 사례로 손꼽일 것이다.
이러한 한·일 관계는 120년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침략의 서전이었다. 불행했던 과거는 망각 속으로 버릴 것이 아니라 오늘에 되새겨 반성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번호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당시 조선의 정세를 살펴보고 평택에 있는 청일전쟁 관련 유적지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 1894년 12월 22일 영국 신문에 실린 일본 군대가 서울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을 조선 사람들이 지켜보는 모습/수원박물관 소장
여전히 유효한 120년 전의 상황
흔히 ‘동학농민혁명’을 ‘청일전쟁’의 원인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만약 동학농민혁명이 없었더라면 청일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역사인식이 아니다. 이미 일본은 1875년 운요호를 강화도 앞바다에 진출시킬 때부터 조선을 침략하려는 행위가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전후하여 무력으로 조선을 침공한다는 ‘조선침략론’ 즉 ‘정한론(征韓論)’이 이미 제기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발로는 ‘임나일본부설’과 ‘임진왜란’ 등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인 1867년 3월 초 규슈(九州) 출신의 일본인 야도(八戶順叔)는 홍콩에 체류한 바 있다. 그는 광둥(廣東)에서 발간되는 <중외신문中外新聞>에 “조선 국왕이 5년에 1번씩 에도(江戶, 현재의 도쿄)에 가서 대군(大君)을 알현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이 고례(古例)이나 조선 국왕이 이런 예를 폐한 지 오래되므로, 일본이 군함 80척을 구입하고 발병(發兵)하여 조선국을 정토할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정한설을 주장하였다. 이에 중국은 조선에 일본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를 크게 중요시 하지 않았다.
강화도조약 이후 본격화된 일본의 침략행위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군을 토멸하는 것으로 그 실체가 드러났다. 이 와중에서 일어난 청일전쟁은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정세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조선풍경 안성천 평택교를 지나가는 일본군’/박성복 소장
‘추팔리전투’ 승리한 일본군 중국까지
지난호에서 살펴보았듯이 1894년 7월 29일에 벌어진 첫 ‘추팔리전투’와 이어 전개된 ‘성환전투’에서 일본군은 청군을 쉽게 격파했다. 앞서 7월 25일 ‘풍도해전’과 ‘추팔리전투’, ‘성환전투’에서 승리한 일본 정부는 8월 1일에서야 비로소 청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는 일본의 비상식적인 침략행위였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행위는 이후 만주사변,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먼저 상대국을 침공하여 일정한 전세를 약화시킨 후 선전포고를 하는 식이었다.
일본 정부는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 열강의 간섭을 피해 가능한 한 빨리 승리를 거두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9월 15일부터 17일에 평양에 집결한 청국군 1만 5000여 명을 격파하고, 17일에는 해전에서 치른 황해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제해권까지 장악하였다. 평양과 황해에서 손쉽게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곧이어 중국 본토에 대한 공략을 서둘렀다. 10월 하순 조선에 진주했던 일본의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진격하였고, 제2군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하여 11월 하순 여순(旅順)과 다롄(大連)을 점령하였다. 이후 1895년 2월 2일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 있던 청국의 북양함대기지를 공략하였다. 웨이하이웨이는 중국과 평택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현재 뱃길이 조성되어 양국 간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교류의 현장이다.
일본군이 북양함대기지까지 공격하자, 청국은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강화회담을 서둘렀다.
1895년 2월 초 두 차례 열린 히로시마(廣島) 회담에서 일본은 자국에 더욱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할 목적으로 청국 전권대신의 위임장이 불완전하다며 그와의 교섭을 거부하고 전투를 재개하였다. 그 결과 3월 중순 일본군은 랴오둥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청국과 회담을 한 히로시마는 바로 대본영이 있던 곳이었다.

▲ 1907년 8월 4일 프랑스 신문에 실린 서울거리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만행과 저항하는 한국인/수원박물관 소장
조선 내정간섭, 마침내 망국에 이르러
청국은 그제야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교체하는 한편 강화회담 재개를 서둘렀다. 3월 20일부터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홍장이 양국을 대표해 강화회의를 다시 열었으나, 3월 24일 ‘이홍장저격사건’이 일어나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양전투’와 ‘황해해전’ 직후부터 전쟁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미국 등 열강의 간섭을 우려한 일본은 결국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성립시켰다. 이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완전하게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는 한편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의 조정을 마음대로 요리했다. 조선의 보호국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종과 박영효(朴泳孝)를 중심으로 하는 친일정부를 꾸렸다. 그리고 조선 정부 내에 일본인 고문관을 배치하고, 조선 정부 제도를 일본식으로 개혁하는 등 조선 정부와 일련의 조약을 체결한 뒤 500만 원의 정치차관 공여 등을 골자로 하는 적극적인 내정개혁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행위는 조선에 대한 장기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로 마침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는 의병전쟁이 일어났다. 바로 ‘을미의병’이다.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을 가야만 했다. 이후 지속된 일본의 침략행위로 조선은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빼앗기는 망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청일전쟁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일본 중심으로 재조정시킨 침략전쟁이었다. 일본은 삼국의 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빼앗는 데는 실패했지만 청일전쟁 결과 대만 등 중국 영토를 식민지로 확보하였고,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이에 비해 청국은 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종주권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분할의 대상국으로 전락했다. 청일전쟁의 전장을 제공한 조선은 갑오개혁 등 근대화를 추진하였지만 일본 침략의 제물이 되었다.
평택 청일전쟁 유적 새롭게 조명해야
한편 평택은 개항 이후 일본의 첫 침략전쟁의 현장이었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정세를 뒤바꾼 역사적 사건이었고, 일본의 첫 해외 침략전쟁이었다. 그 현장이 바로 평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전혀 관심이나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번 <평택시사신문> 특별기획 ‘동학농민혁명·청일전쟁 120주년’으로 그동안 널리 알려졌던 천안의 ‘성환전투’보다 앞서 평택 팽성 추팔리에서 첫 전투가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동안 청나라 군사가 들어왔다고 알려진 군물포(군문포)는 일본군이 점령한 바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평택 서해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계두진에도 주둔했다.
그동안 평택은 청일전쟁에서 약간 비켜나 있었다. 이는 청일전쟁하면 ‘성환전투’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택의 역사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평택이 무너지나 아산이 깨지나’라는 속담을 통해서 청일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취재에서 평택은 청일전쟁의 현장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 침략전쟁의 현장이 바로 평택이었다. 어느 면에서는 부끄러운 역사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를 왜곡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일본의 침략행위를 올바르게 일깨워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 군문포가 내려다 보이는 안성천의 현재 모습/박성복 소장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과거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한다. 비록 우리에게 좀 불리한 역사라고 도외시한다면 언젠가는 다시 반복될 수 있다. 역사의 현장은 역사교육의 중요한 교재이다. 그동안 잊히고 버려졌던 역사의 현장을 이제는 올바르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청일전쟁’을 ‘갑오전쟁’이라 한다. 중국 근대사상가인 양계초는 “중국이 5000년 꿈에서 깨어난 것은 청일전쟁 패배에서 비로소 시작됐다”고 말할 정도로 충격이 컸던 사건이다. 그런 역사적 사건을 기리기 위해 ‘중국갑오전쟁박물관’을 건립했다. 그 이유는 비록 중국이 일본에 참패한 전쟁이지만 이를 잊지 않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올해 ‘청일전쟁 120주년’을 맞아 많은 중국인들이 참관하고 있다.
청일전쟁은 그동안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하여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올해가 청일전쟁 두 주갑을 맞는 120주년이지만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평택시사신문> 특별기획으로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고 취재를 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글/성주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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