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8월 11일

평택역 앞 3300여 평 연못 매워
4~5일간 준공식, 운동·여흥 축제

 
“다년간 현안 중에 있던 평택 시구개정(平澤 市區改正)도 이제는 수얼 전에 그 준공을 보게 되어 시구 중앙에 보기 싫게 놓여있던 연못 위에는 수많은 상점과 주택이 건축되어 있고 광활한 시구 도로는 바둑판형으로 놓이게 되어 신흥도시의 평택시장이 일층 더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택 관공시민은 지난 11일 평택면사무소 회의실에 모여 평택 시구개정 준공식 협찬회를 조직하고 조선, 동아 양 지국 후원으로 오는 음력 7월 10일부터 4·5일간 준공식을 거행하며 일방으로 각기 운동 기타 여흥을 개최하기로 하고 각 부서를 분담하여 위원을 선정하여 착착 그 준비를 진행 중이다”(동아일보 1933년 8월 25일)
1938년 4월까지 진위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택’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한 것은 1905년 개통된 경부선 평택역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이후 평택역 부근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평택이 신도시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렇지만 평택이라는 신흥도시로 성장한 것은 1932년 시구개정(市區改正)이 본격화되면서부터다. 평택이라는 지명은 평평할 평(平)과 못 택(澤)에서 왔다. 즉 넓은 들과 연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지도에 따르면 평택역을 중심으로 연못이 적어도 서너 개 정도 있었다. 지금은 이 연못들이 모두 메워져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연못이 메워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였다. 바로 평택 시구개정을 위한 조치였다.
1932년 4월부터 시작된 평택 시구개정 작업은 3300평의 연못을 메우는 것이었다. 연못을 메운 뒤 이곳에 새로운 상점과 주택을 건립하기 위한 시정개정사업은 약 4개월에 걸쳐 8월경에 끝났다. 신흥도시가 들어설 곳은 입찰경매로 분배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구개정으로 신흥도시가 들어설 지역의 도로는 바둑판형으로 조성되었다. 여기에 평택시장이 새로 마련됨에 따라 평택은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진위군 평택면사무소는 8월 11일 회의실에서 ‘평택 시구개정 준공식 협찬회’를 조직했다. 여기에 국내의 주요 언론기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지국이 이를 후원하기로 했다. 협찬회는 당시 군수를 비롯해 지역 유지들이 참여했다. 준공식은 음력 7월 15일부터 4~5일간 거행하기로 했다. 준공식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지역 축제였다. 각종 운동경기를 비롯해 다양한 여흥을 곁들였다.
당시 평택의 시구개정은 지형적으로는 평택역 앞의 연못을 메우는 것이었지만 오늘날에 본다면 획기적인 도시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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