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일전쟁은 단순히
청·일 양국 간의 전쟁이 아닌
동아시아 패권을 다투는 전쟁으로
본격적 첫 전투는 평택에서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지 두 갑주 즉 120년이 되는 해이다. 청일전쟁은 단순히 청나라와 일본 양국 간의 전쟁이 아니라 조선을 두고 기존 중국 중심이었던 전근대적 동아시아 질서를 신흥세력인 일본이 제국주의적 패권을 잡는 국제전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대상이 되어 인적·물적으로 혹독한 수난을 겪어야 했는데 청일전쟁은 이러한 세계사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평택에서도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평택시사신문>의 ‘동학농민혁명·청일전쟁 120주년 특집-평택이 무너지나 아산이 깨지나’ 특별기획이 지난 호를 마지막으로 모두 5회 연재를 마무리했다. 이 연재는 왜 평택에서 청일전쟁의 의미를 찾는지 알게 하는 뜻 깊은 기획이었다.
이번 기획은 깊이 있는 글과 다양한 자료를 통해 청일전쟁의 배경과 과정, 일본제국주의 야심,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 정세 등 큰 흐름에서의 청일전쟁과 평택에서의 동학농민혁명 전개, 청일전쟁 과정과 의미, 전적지 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성환전투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수 있었으며, 성환전투 이전 추팔리 일대에서의 전투로 청일전쟁의 첫 전투가 시작됐음을 새롭게 밝혀 낸 점은 이번 기획의 큰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평택은 조선시대 주요도로인 삼남대로와 충청수영로가 지나고 아산만과 안성천·진위천을 통한 나루와 포구가 발달하였으며 이러한 점은 평택이 청일전쟁의 주요한 무대가 되는 조건이 되었다. 평택의 청일전쟁의 주요 유적지를 살펴보면 소사벌은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소사원이 있던 삼남대로의 주요기점이었으며 소사장이 있던 곳이다. 군문포 역시 충청수영로의 요지였으며 인마와 문물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육로와 수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임진왜란 육전 3대첩의 하나인 ‘소사벌대첩’ 현장이 바로 이곳이라는 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평택에서 청일전쟁이 시작된 것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이런 역사 현장은 지금도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군문포·청망평·망군다리·몰왜보 같은 지명과 이번 기획의 제목인 ‘평택이 무너지나, 아산이 깨지나’ 같은 관용어구 역시 청일전쟁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평택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판 하나 없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현장이라고는 하나 이를 무시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되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일본의 우경화 모습은 120년 전 일본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어 청일전쟁은 120년 전 끝난 전쟁이 아니라 현재에도 살아 있으며, 청일전쟁 평택유적은 이러한 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교재이다. 
마지막으로 지난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간 성주현 청암대 연구교수, 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부사장과 함께 특별기획취재단으로 현장취재를 다녀왔던 필자로서는 이번 연재가 더욱 의미 있었다. 기고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한다.

 

▲ 황수근 학예연구사 평택문화원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