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 제 씨의 발기로 숙원사업 추진
윤치소 500원·일본인 500여 평 기부

 
“평택 거주 유지 제 씨의 발기로 다년 숙원이었던 시가 주위 제방공사는 목하 착착 진행 중인데, 이에 대하여 시가 내에 거주하는 인사와 각 지주 등이 공동일치로 그 성적의 철저 발휘를 기할 뿐 아니라 해 공사비에 취하여 도청으로부터 일부의 보조가 유할 터이라 하며, 또는 유지 윤치소 씨의 5백 원 연출(捐出)과 화다(和田常市) 씨의 부지 450평 기부가 유하였더라”(동아일보 1920년 9월 12일)

평택은 서해안에 접해 있고 진위천과 안성천이 흐르고 있어 홍수에 취약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평소에도 많은 비가 내리거나 장마철이 되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금의 원평동은 안성천이 지나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지대여서 물난리를 자주 겪었다. 특히 1920년 9월 6일부터 내린 비는 10년 이래 대홍수로 평가될 정도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한강 연안의 홍수로 피해 광경이 처참”, “경기 이남은 농작물의 피해가 적지 않아”, “경성지방 사이의 자동차 연락이 막혀”라고 할 정도로 피해가 적지 않았다. 진위 일대는 6일부터 내린 비로 안성천이 범람해 평택 시가는 완전히 물에 잠겼으며 인근의 마을에는 길이 막혔고 남자 한 명이 물에 빠져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외에도 세 채의 집이 무너질 정도로 피해가 컸다. 평택지역의 농경지는 전부가 진흙물의 바다를 이루어 그 광경이 극히 처참했다. 말 그대로 ‘니해(泥海)의 평택’이었다.
이처럼 장마철이면 평택 시가가 물에 잠기는 등 피해가 극심 하자 평택 주민들은 홍수를 막을 수 있는 제방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이자 숙원사업이었다. 이에 일본인을 포함한 유지들의 발기로 제방공사를 추진하기로 했던 것이다. 제방공사를 위한 공사비와 부지가 필요했는데 평택뿐만 아니라 천안과 아산 일대의 대지주이며 만석꾼인 윤치소(尹致昭)가 거금 500원을 내놓았다. 윤치소는 아산 둔포 출신으로 윤영렬의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윤치오·윤치성·윤치영 등이 있다. 유복한 유년기를 보낸 윤치소는 성인이 될 무렵 그의 집안은 굉장한 부자였는데 집의 크기가 200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유회군을 조직해 천안 일대의 동학군을 진압하기도 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윤치소는 서울 안동교회를 설립했다. 1924년 4월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쌀 120가마에 해당하는 2000원을 국방헌금으로 기증한 바 있고 애국경기도호 군용기헌납기성회 집행위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아들 윤보선은 4대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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