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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2. 길과 주막 그리고 사람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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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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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원은 삼남대로 경기 구간 마지막 주막
소사장은 평택남부의 가장 큰 장시로
대장간·우시장·간이주막들이 많았다

 

   
▲ 삼남대로 소사원과 소사장이 있었던 소사1동 원소사마을과 소사벌


1 - 소사주막-충청도와 경기도의 관문關門

   
▲ 안성천 아교 넘어 충청도 직산고을 첫 마을 가룡마을
주막은 ‘길의 정거장’이었다. 삼남대로처럼 큰길가의 주막은 왕도 쉬었다가고 고관대작과 부상대고들도 머물다 갔다. 지역과 지역,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던 작은 길목에는 민중들의 주막이 있었다. 민중들은 주막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허기진 배를 채웠으며 세상소식을 접했다. 때론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의장소가 될 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옛 주막에는 사람냄새, 다양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잊혀져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 우리의 자화상이며 그리움이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8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그리고 주막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 놓으려 한다. 독자들의 애정과 관심을 기대한다. - 편집자 주 -

 

 

   
▲ 몰왜보가 있었던 안성천 아교

■ 주막酒幕, 소통과 애환의 정거장
평택平澤은 ‘물의 도시’이며 ‘길의 도시’다. 근대 전후만 해도 뭍에는 뭍의 길이 있었고, 물에는 물길이 따로 있었다. 사람들이 다녔던 길이 있는가 하면 말들이 달렸던 역로驛路가 있었고 소나 마차가 다녔던 길도 따로 있었다. 근대 이후에는 철도와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길과 함께 사람들의 삶도 크게 변했다. 주막은 모든 이들의 길과 그 길을 오갔던 사람들의 정거장이었다. 그래서 임금도, 지체가 높거나 낮은 사람도, 과객들이나 장돌뱅이들도, 심지어는 역적질을 하다가 도망치던 사람들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머물다 갔다.
 

 

 

   
▲ 삼남대로 경기도의 첫 마을 유천1동 양성 유천마을
근대 이전의 주막酒幕은 술집과 식당·여관·주차장을 겸하였다. 보통의 주막들은 장터나 길목· 나루터에 많았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회지에도 있었다. 평택지역에는 조선전기 8곳의 역원驛院이 설치되었다가 조선 후기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대부분 문을 닫았고 그 대신 수 십 개의 점막店幕들이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근대 이후 교통망이 변하고 생활구조가 바뀌면서 변질되거나 점점 사라져갔다.
소사원素沙院은 소사1동에 있었다. 소사원의 본래 이름은 소초원所草院. 조선 전기만 해도 소사벌에 갈대가 무성하여 ‘초草’자를 넣어 불렀다. ‘소사素沙’라는 지명은 조선 후기의 산물이다. 소사천 좌우의 저습한 하천부지가 개간되고 갈대가 제거되면서 흰 모래벌, 다시 말해서 ‘소사素沙’가 되었다.

 

 

   
▲ 일제강점기 대평택교로 불린 유천교

소사원은 삼남대로 경기도 구간의 마지막 주막이었다. 주막은 소사1동 당산 남쪽에 있었다. 뒷산에는 참나무 당목이 보호하고 동쪽에는 소사동미륵이 든든하게 지켜주는 자리. 참나무 당목 옆에는 영의정을 지낸 김육이 호서에 실시한 대동법을 기려 세운 ‘대동균역불망비’가 세워졌으며, 길가에는 양성고을 수령들의 공덕비·선정비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삼남의 사람들과 다양한 물산이 오가는 길목이다 보니 조선 후기에는 장시가 발달하였다. 소사장은 평택 남부지역의 가장 큰 장시였다. 그래서 마을 한쪽에는 대장간도 있었고 한 때는 우시장도 있었으며 장날에는 간이주막들도 많았다.

안성천 너머 첫 마을 가룡
조선시대 삼남대로는 소사벌을 가로질러 안성천 징검다리와 아교(애구다리)를 건넌 뒤 충청도 직산고을의 가룡마을로 들어갔다. 가룡마을은 삼남대로 충청도 구간의 첫 마을이다. 한양에서 삼남대로를 따라 내려오던 파발이나 가마행렬은 이곳에서 분기하여 삼남대로 따라 홍경원과 천안으로 내려가거나 충청도 평택현을 거쳐 온양으로 향했다.

 

   
▲ 춘향이와 이몽룡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소사교

가룡마을 앞 안성천은 본래 물줄기가 두 갈래였다. 수심이 낮고 좀 더 넓었던 평택 방향의 하천은 징검다리를 놓아 넘어 다녔고, 폭은 좁지만 수심이 깊었던 충청도 쪽의 하천은 ‘아교’라는 목교木橋를 놓아 건넜다. 아교는 통상 ‘애구다리’라고 부른다. 수심이 깊어 넘기 힘들어 ‘애구애구’하며 건넜기 때문이란다. 애구다리 아래는 청일전쟁(1894)의 격전지다. 소사1동에 진을 쳤던 일본군이 성환 월봉산의 청군을 기습하기 위해 전초부대를 파견했다가 애구다리에서 몰살당한 사건이 그것이다. 그래서 유래된 지명이 ‘몰왜보’. 가룡마을 토박이 강시영(84세·남) 씨는 일제 말 몰왜보 옆에 일본군 장교 ‘야마가다’의 송덕비가 세워졌다고 말했다. 송덕비는 고딕양식 형태의 뾰족한 탑이었고 일제 말에는 성환초등학생들이 참배도 다녔다는데 해방 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동네 청년들이 부숴버렸다고 한다.

 

   
▲ 청일전쟁의 격전지였던 소사벌

가룡마을 주민들은 애구다리는 기억했지만 삼남대로를 따라 소사동을 오갔던 기억은 없었다. 가룡과 가까운 미양면 양영리 염통마을에 산다는 윤영일(71세·남) 씨도 썰물 때 ‘뜀다리’로 공도면 중복리로 넘어 다니기는 했지만 소사동을 오갔던 기억은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삼남대로 소사길이 지워지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경부선 철도와 국도 1호선 그리고 유천교(대평택교·흰다리)의 건설 때문이었다. 평택역 앞에 근대도시가 발달하면서 신작로는 유천동과 샛개를 지나 원평동 방향으로 놓였고, 민중들은 가치가 떨어진 소사길 보다는 국도 1호선을 따라 철도와 시장·교육시설이 발달한 평택과 성환을 오가게 되었다.

 

 

   
▲ 소사주막 터와 소사동미륵
■ 평택남부의 거점 소사장 그리고 소사주막
철도와 국도 1호선이 건설되고 평택역전에 평택장이 개장開場된 뒤에도 소사길은 한동안 제 기능을 발휘했다. 안성천 건너 가룡이나 홍경마을 사람들은 유천교를 건너 평택장을 봤지만, 평택 남부지역의 여러 마을들은 낮선 평택장보다 소사장을 선호했다. 소사장은 소사1동 앞 소사천 변에 있었다. 시장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장날이면 장터 주위로 천막들이 길게 늘어섰고 각종 상점들과 간이주막들이 줄지어 섰다. 장터 서쪽에는 대장간과 우시장도 있었다고 한다. 2001년에 인터뷰하였던 윤유복녀(당시 92세·작고·여) 씨는 소사장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산물 뿐 아니라 서울에서 내려오는 진귀한 상품, 안성천으로 들어오는 새우젓이나 조기젓이 거래되어 장꾼들이 많았다고 자랑했다. 장날이면 각종 물산과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주변 마을 왈짜패들도 소사장에서 힘자랑을 하였다. 월곡1동 전용래(2012년·86세·남) 씨는 100여 년 전 월구리 마을에는 힘센 일곱 형제가 살았는데 장날만 되면 소사장에서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상인들과 장꾼들이 도망가기 일쑤였다고 회고했다.
‘소사원’은 조선 후기 문을 닫았다. 대신 그 자리에 민영주막인 ‘소사주막’이 명맥을 이었다. 1899년에 편찬된 <양성군읍지>에도 ‘소사원은 현縣 남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지금은 없다’라고 기록하였다. 대신 고지도에 ‘소사주막’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소사주막이다. 주민들의 기억 속의 소사주막은 일제강점기까지 운영되었다. 주막은 봉놋방이 달린 길쭉한 건물에 마방이 갖춰져 상인들이 많이 머물렀다고 하였다. 소사주막이 상설이라면 소사장날에만 문을 여는 주막들은 간이주막이었다. 간이주막은 소사교 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천막 안에는 목로가 몇 개 놓여있었고 주모들은 너스레를 떨며 술국과 막걸리·장국을 팔았다.
소사장은 1920년대 초 폐장廢場되었다. 평택역 앞의 평택장이 발달하면서 주변의 물산들이 그곳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날마저 소사장과 같은 5일과 10일이어서 도저히 경쟁이 되지 않았다. 소사장이 폐장되면서 상인들도 떠나고 간이주막들도 문을 닫았다. 해방 전후에는 사람과 물산의 통행이 뜸해지면서 마지막 남은 소사주막마저 명맥이 끊겼다.
잊혀진 것들에는 그리움과 슬픔이 공존한다. 주막과 공생하며 살았던 소사1동은 현재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수 백 년을 살아온 원주민들도 대부분 마을을 떠났다. 오가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던 소사주막과 소사장,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무더운 여름철이면 ‘장터로 나오시게’라며 벗들을 불러냈던 마을 노인들까지도 이제는 잊혀진 사람들이 되었다.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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