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9월 12일

9월 24일 오후 출발, 7박 8일
내외금강·해금강·원산·석왕사 등

 

 
“금강산 탐승단 모집, 출발 : 9월 24일 오후 8시 15분,  귀착 : 10월 1일 오후 11시 2분,  회비 : 1인 20원(차임, 자동차임, 선임, 숙박료, 중식, 차대, 안내료, 침대료 포함),  신청기일 : 9월 20일까지,  신청소 : 동아일보 평택지국, 서정리분국, 탐승지 : 내외금강, 해금강, 원산, 석왕사, 삼방, 경성,  주최 : 동아일보 평택지국, 서정리분국, 후원 : 평택역, 서정리역” (동아일보 1932년 9월 22일)

일반적으로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서 가장 먼저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여행(旅行)’이다. 여행의 의미는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유람을 목적으로 객지를 두루 돌아다님’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이란 유람을 목적으로 집을 떠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즘은 여행하면 해외여행이 떠오르지만 예나 지금이나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가 금강산(金剛山)이었다. 제주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불리는 김만덕(金萬德)도 가장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 금강산이었다.
여행은 주로 홀로 떠나는 것이지만 단체로 여행 가는 것을 관광(觀光)이라고 한다. 근대의 상징이라고 하는 철도가 생기면서 관광이 점차 보편화됐다. 지금은 북녘이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금강산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자유로이 관광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단체로 가는 관광단을 ‘탐승단(探勝團)’이라고 했다. 금강산 관광은 1914년 경원선과 1923년 금강산 전기철도가 개통하면서 대중화됐다. 금강산의 관광의 백미는 울긋불긋한 단풍이었다. 그래서 금강산 관광은 주로 가을에 모집했다.
평택에서도 드디어 1932년 9월 들어 ‘금강산 탐승대’를 모집하는 광고가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다. <동아일보>에 서너 차례 게재된 광고에 의하면 당시의 금강산 관광은 다음과 같았다.
금강산 관광단의 모집은 동아일보 평택지국과 서정리분국에서 주최하였고 평택역과 서정리역에서 후원했다. 모집 신청은 9월 20일까지였으며 출발은 9월 24일 오후 8시 15분이었다. 출발역은 평택역과 서정리역. 돌아오는 것은 10월 1일 오후 11시 2분으로 7박 8일간의 여정이었다. 비용은 1인당 20원이었는데 이동수단인 기차와 자동차 요금·뱃삯·숙박비·가이드 비용·침대사용료·식사와 찻값도 포함되었다. 탐승대의 경유지는 내금강·해금강·외금강뿐만 아니라 가는 길목인 원산·석왕사·삼방폭포·서울 등지의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금강산 관광은 단순한 관광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비록 일제강점기 시기였지만 당시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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