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잃고 평택에 와서 사는 사람들

 
박 씨 아저씨는 다시 공사판으로 나갔습니다. 구멍가게에 가도 박 씨 아저씨를 만나지 못하자 나는 박 씨 아저씨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가게에 갈 때면 나는 곧잘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노는 날이면 아저씨는 어김없이 혼자 가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아들이 하나 있기는 하다지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들은 멀리 객지에 나가 어느 중국집에서 짜장면 배달을 하며 살고 있는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군대를 갈 때가 되어서 평택으로 돌아올 거라며 아저씨는 좋아했습니다.
-아 글쎄, 우리 아이가 말이외다 군대를 갈거외다 기래서 내래 기왕 군대를 갈거이면 전방으루 보내달라구 하라구 기랬지 뭡네까. 기래야 나두 아들 면회를 가는 통에 우리 고향에 한발자국이라두 더 가까이 가 볼거이래 아닙네까.
박 씨 아저씨는 술만 먹으면 아들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러다가도 가끔씩 박 씨 아저씨는 누구랑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삿대질을 해가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습니다.
-오, 선재로구나 아바진 잘 계세?
-예
-어데, 일 나가센?
-예
-춥갔구나.
아저씨 말을 듣고서야 나는 아버지가 이 추운 때 건물 꼭대기에서 일을 하느라 얼마나 귀가 시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땀이 철철 흐르는 한여름에도 벽돌을 오십 장, 육십 짱씩 어깨에 메고는 공사장 계단을 오르내렸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입고 다니는 런닝셔츠는 언제나 땀에 절은 등허리부터 삭아서 구멍이 뚫리곤 했습니다.
-뭐 먹고 싶은 거이 있으만 날래 집으라우. 어데, 이거가? 아니믄 이걸루?
희한하게도 아저씨는 내가 꼭 먹고 싶은 걸로만 골라서 내 손에 집어주었습니다. 그러는 걸 알면 누나한테 야단을 맞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가끔씩 구멍가게 앞을 지나다가 가게 안을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안에 아저씨가 있는 기미가 보이면 나는 물건을 사러 온 척하고 가게 안에 들어가서 괜히 과자를 이것도 만져보고 저것도 만져보았습니다.
-선재 왔네? 오늘은 또 머이래 먹구 싶으네?
아저씨는 비싼 걸로만 골라서 내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거저 아프지만 말구 잘 놀아야 돼. 잘 뛰어놀라우.
박 씨 아저씨는 다른 사람들처럼 공부 잘 하라는 소리는 한 번도 하질 않았습니다.
벌써 11월 말이 가까워 오는데 오라는 눈은 안 오고 하늘에서는 며칠째 계속 질금질금 비를 뿌려댔습니다.
-선재야, 우리 점심 때 라면 끓여 먹을까?
아버지가 주는 돈을 들고 가게로 뛰어가니 박 씨 아저씨도 비가 와서 일이 없었던지 웬 낯선 사람과 마주앉아서 술을 먹고 있었습니다.
-난 말이외다. 아직두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피난민이란 말이외다. 데메사니 거 뭐이라구 기러더라 하여간 이북 땅에서 태어나 육이오 때 피난을 내려와서 남한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사십만? 아, 이제는 사십만도 채 안 되갔구나. 기러니까니 이제 남한 땅에는 사변통에 피난을 내려온 삼팔따라지래 몇 명 안 남았다 이거외다. 집두 힐어베리구 고향두 팡가치구 부모두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니 이런 비참한 백성이 세상에 또 어드메 있갔나 말이외다.
박 씨 아저씨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는 바람에 탁자 위에 있던 놓여있던 소주병이 넘어지면서 땅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습니다.
-아주마니 여기 쇠주 하나 더
나는 얼른 라면을 사서 들고 집으로 뛰어왔습니다. 비가 와서 아버지가 일을 쉰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매일 새벽 평택 역전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훤히 동이 터오는 여섯시 반까지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그 날 일은 없었습니다. 그 시간이 되도록 모닥불을 피워놓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역전 옆 골목 안으로 줄줄이 늘어선 술집으로 몰려가 아침부터 외상술을 마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이 없는 날이면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와 밥을 해서는 도시락까지 싸주었습니다.
김장철이 돌아오고 추위가 시작되면서 박 씨 아저씨는 가게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사내새끼래 이 넓은 세상을 두구 뭐이 안타까와서 새장 속에 갇히와서 살갔네. 못 먹구 입성을 제대루 못 닙어두 훨훨 날면서 살아야디. 일이 있으만 부산에두 가구, 누가 오라 기러기만 하믄 목포두 내 집이구 기런거디.
박 씨 아저씨는 당장 죽어도 속에 불이 나서 봉급쟁이 생활은 못하겠다면서 학교 소사 일자리를 그만두고 다시 공사판으로 나갔습니다. 구멍가게에 가도 박 씨 아저씨를 만나지 못하자 나는 박 씨 아저씨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아니, 이게 누굽니까?
설날 아침 서울 가는 기차를 타려고 평택 역전 구름다리를 건너던 아버지와 나는 박 씨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명절인데도 아저씨는 양복차림이 아니었습니다. 아저씨는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되신거예요?
아버지 말에 박 씨 아저씨는 입가에 침을 흘리며 그냥 웃기만 했습니다.
-거 있잖아요. 지난달 되게 춥던 날 말이에요. 아, 글쎄 이 양반이 술을 잔뜩 잡숫구는 불두 안 넌 냉방에서 꼬부리구 잤으니 동태가 되서 얼어죽지 않은 것만두 다행이지 뭐예요.
박 씨 아저씨 곁에 따라오던 낯선 아저씨가 손짓 발짓을 해가며 목청을 돋우어서 그 동안 박 씨 아저씨가 중풍에 걸려 말까지 못하게 된 내력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 몸을 해가지구 한사코 역엘 나가 보겠다는거예요. 아마 명절이 되니까 고향생각이 더 나서 그러시겠죠, 뭐.
박 씨 아저씨는 절뚝거리며 구름다리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그것이 내가 본 박 씨 아저씨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1976년 평택읍 비전리에서
*1995년 가톨릭 ‘소년’ 1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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