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에서 농사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하래요”

가족의 배려로 경희대 진학, 영미문학 전공
다문화 가정과 결혼이민자 돕는 일 하고파

 
레리베스 바낙(Lelibeth Banaag), 그녀가 필리핀에서 한국 농촌으로 시집온 것은 5년 전이다. 지금 그녀의 나이가 24살이니 19살에 한국 남성과 결혼생활을 시작한 것.
평택시 서탄면 내천리 자택에서 만난 그녀는 아직도 소녀티가 엿보일 만큼 어리고 순박해 보였지만 남편 김용관(44) 씨와 함께 팔순의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 당찬 주부다.
넓은 들판 가운데 자리 잡은 동네에 사는 시부모와 남편은 벼농사를 짓는 대농이다. 그러나 며느리와 아내에게는 농번기에도 손에 흙을 전혀 묻히지 못할 만큼 끔찍한 사랑을 쏟고 있다. 레리베스 씨가 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일은 단지 시어머니를 거들어 식사를 준비하는 일과 공부하는 것뿐이다.
그녀는 지난해부터 시부모님의 배려로 대학생이 되었다. 경희대 수원캠퍼스에 매일 통학하며 새로운 학문을 익히고 배우며 여대생으로서 캠퍼스의 낭만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이다. 올봄 2학년에 진학한 그녀의 전공은 영문학이다. 하지만 욕심 많은 그녀는 앞으로 한국어도 복수전공할 계획이란다.
“아내의 고교시절 성적표를 보고 머리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필리핀에서 공부를 너무 잘 했는데 집안이 가난해 진학하지 못한 거죠. 그래서 아버지께 공부를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죠.”
남편 김용관 씨는 아내의 재능을 살리고자 대학진학을 건의했고 며느리 사랑이 극진한 시아버지는 두말 않고 허락을 했다. 이에 부응하듯 레리베스는 지난해 봄 경희대 외국인 특례입학 전형에 거뜬히 합격해 후원자들을 기쁘게 했다. “1학년 성적이 참 좋았어요” 남편의 아내 자랑은 끝이 없다. 하지만 레리베스 씨는 한국어로 진행하는 강의가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교수님들의 말이 빨라서 알아듣기 힘들어요. 그래서 올해는 영어강의를 많이 신청했습니다.” 다행히 경희대 수원캠퍼스는 국제캠퍼스로 명명할 정도로 영어강좌가 많이 개설돼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장학제도와 다양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집에서 학교까지는 승용차로 30분 정도의 거리. 처음에는 시아버지가 가까운 오산 시내까지 태워다주면 거기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통학을 했다. 그러다가 시아버지가 승용차를 사줬 지금은 자가용으로 통학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필리핀에 가서 며느리를 처음 봤을 때도 괜찮다고 느꼈지만 같이 지내면서 보니 아주 착실해요.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애쓰고 말을 잘 못해도 별로 불편함을 못 느껴요. 아들과는 잘 통하니까요” 시아버지 김철수(80) 씨의 칭찬에 뒤질 새라 시어머니 신정숙(81) 씨도 한편 거들었다. “며느리가 참 착해요. 한국음식도 잘 하죠. 한국여자보다 차라리 더 괜찮다는 생각도 해요.”
두 노부부는 며느리 칭찬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가장 처음 며느리를 선택한 사람도 사실은 시아버지였다. 시아버지가 필리핀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레리베스 씨를 보고 아들의 배우자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웃에 사는 조카를 통해 그녀를 소개받은 것.
“저는 결혼에 한 번 실패를 하고 10년 넘게 혼자 지내면서 재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필리핀에 다녀오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필리핀에 갔지요. 처음에 너무 착하고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아내의 심성에 반했죠. 우리는 3개월 동안 교제한 후 결혼했습니다.”
김용관 씨는 레리베스 양과 교제하기 위해 필리핀 현지에서 지내면서 조카의 도움을 받아 타갈로그어를 열심히 배웠다. 자신에게는 영어보다 오히려 현지 원주민들이 쓰는 말을 배우기가 더 쉬웠다고 한다. 레리베스 씨 집안에서 혼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김용관씨는 집요하게 문을 두드린 끝에 세 번 만에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이들의 나이 차이가 20년이나 되지만 필리핀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는 이상하게 여기지만 사랑으로 가득한 두 사람은 주변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고 알콩달콩 깨소금 가정을 일궈나가기에 여념이 없다.
 
아내를 대학에 보내며 흐뭇해하는 남편 김 씨, 그러나 정작 본인은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다. 전문대학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오로지 농사밖에 모르는 농군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는 아내만 원하면 대학원까지 보낼 생각이다. 그녀에게 꿈을 물어보았더니 영어학원을 차리겠단다. 그러나 남편은 은근히 불만을 표시하며 더 큰 꿈을 가지라고 아내에게 압력 아닌 압력을 넣는다.
“다문화 가정과 관련된 일을 생각하고 있어요. 결혼이민자들과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고 싶은데 이자스민 같은 사람요”
이자스민은 필리핀 출신의 귀화여성으로 이번 제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모 정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을 받아 화재에 오른 인물이다. 남편은 비로소 만족해하며 사랑스런 눈길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남편과 시부모님의 희망이 되어가는 그녀는 다문화 가족들 모두에게도 또 하나의 희망이 되길 기대해본다.
 

※다문화가족이란?
우리사회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민자, 북한이탈주민(새터민), 외국인거주자 및 그들의 자녀들을 비차별적으로 부르는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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