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전통문화 말살정책에도
진위 출신 유세기의 노력으로
사당패社黨牌가 일어나다

 

▲ 평택농악 오무동 곡마단(국립국악원 야외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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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우리 전통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남사당놀이를 전국적으로 금기시 했다.
이때 진위 출신 유세기가
안성경찰서에 경부로 재직하면서
유일하게 안성경찰서에서만
남사당놀이를 허가해줬다.
사당패를 허가해준다는 소식을 들은 예인들은
평택과 안성지역으로 집중 이주하게 됐다.
이 때문에 평택과 안성은
진위와 청룡사를 본거지로 해
사당패의 중심지가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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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1월말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에서 열리는 ‘제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우리나라에서 신청한 ‘농악’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여부가 판가름 나게 된다. ‘농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경우 우리나라는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첫 등재된 이후 판소리-강릉단오제-강강술래-남사당놀이-영산재-제주칠머리당영등굿-처용무-가곡-대목장-매사냥-줄타기-택견-한산모시짜기-아리랑-김장문화에 이어 국내에서는 17번째, 국제적으로는 88개국 297번째로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예를 안는다. 문화재청이 지난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처음 제출한 농악은 ‘평택농악’을 비롯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6곳과 시·도 지정 무형문화재 14곳 등 모두 20곳의 농악이 동시에 등재 신청됐다. 특히 평택농악은 경기·서울·인천·충청권 전역과 강원 일부지역을 대표하는 웃다리농악으로 전체 인구의 60%인 3100만 명을 아울러 우리나라 농악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평택시사신문>은 두레굿과 걸립굿을 모두 수용해 역동성과 연희성이 뛰어나 세계인에게 사랑받고 있는 평택농악의 역사와 명인·연희·세계화·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발전 과제에 대해 11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웃다리지역을 대표하는 ‘평택농악’
1985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 사당거사의 공연 장면(기산풍속도 2)
농악은 우리 선조들의 감성과 직감이 낳은 문화유산이다. 우리민족의 심성이 가장 잘 표현된 민중의 음악이요 춤이다. 이러한 농악은 농경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수렵시대에 짐승몰이를 위한 타악기 사용이 그 시원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악기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전해진다. 농악은 이러한 행위에서 발전해 마을 농악대가 형성되고 지신밟기와 두레농악으로 발전해왔다. 농악은 지역에 따라 명칭도 조금씩 달라지고 내용과 형식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농악은 풍물·두레·풍장·굿이라고도 한다. 농악은 농경문화에서 김매기·논매기·모심기 등 힘든 일을 할 때 일의 능률을 올리고 피로를 덜며 나아가서는 협동심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은 각종 명절이나 동제洞祭·걸립굿·두레굿과 같은 의식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고 있으며 가락과 악기를 변형해 사물놀이나 타악 퍼포먼스로 공연해 세계인에게 찬사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농악은 크게 ▲경기·서울·인천·충청권 전역과 강원도 영서지역이 속한 웃다리농악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동부 산악지역의 호남좌도농악 ▲전라도 서부 평야지역의 호남우도농악 ▲경상도 지방의 영남농악 ▲태백산맥 너머의 영동농악 등으로 나누어진다. 각 지역에는 그 지역의 대표성을 인정받은 농악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현재 6곳의 농악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이며 평택농악은 웃다리농악을 대표한다.
특히 웃다리농악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충청·강원지역까지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농악으로 1985년 12월 1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돼 원형 보존은 물론 전승되어오고 있다.

 

▲ 유세기 著 <시조창법>, 문화당, 1952년

 

 

진위사당패, 대원군에게서 농기 받아
일제강점기 진위 유세기가 사당패 살려

▲ 평택농악 두레굿
평택시는 소샛들이라는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주곡인 쌀을 비롯한 농산물이 풍요했고 이러한 산물産物의 풍요는 농민문화를 일으켜 평택지방의 농악을 이루게 됐다. 평택은 드넓은 소샛들을 중심으로 농경문화가 발달해 여러 고장에서 예인들이 모여들어 사당패社黨牌(寺黨牌·寺堂牌)들의 중심지가 됐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의 사당패 중에서도 평택 진위지방을 중심으로 유세기의 부친이 주도한 ‘진위사당패振威社黨牌’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로 인해 농악도 발달했다.
평택농악의 계보를 이야기 하자면 유세기의 부친과 유세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세기의 부친은 1860년대 이전부터 남사당을 키워왔다. 그의 아들 유세기는 1984년 당시 91세의 나이에도 전국 5대 놀이패인 진위패를 육성했고 농악과 시조 등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는 <원형 시조 창법>이 있고, 작고할 때까지 평택 진위면에 거주했다.
특히 진위군 봉남리에 거주한 유세기의 부친은 당시 진위현 관청에 딸린 관리인 아전이면서도 솥을 만들어 파는 솥전을 대대적으로 경영했다. 이때 농악에 소질 있는 예인들을 전국적으로 불러들여 종업원으로 등용했으며 솥전이 바쁠 때는 솥을 만들고 평소에는 농악을 연마시켜나갔다.
1867년(조선 고종 4년) 흥선대원군 재임 시 경복궁이 중건되자 ‘경복궁 건축 위안공연’에 초대받은 진위사당패는 신명나는 공연을 해 대원군에게서 ‘진위군대도방권농지기’라는 농기都大房旗와 함께 풍물꾼 전체가 삼색 어깨띠를 하사받았으며, 이 자리에서 상쇠 김덕일은 ‘오위장五衛將’이란 벼슬을 받기도 해 그 당시 진위농악이 경기농악을 대표하는 실력으로 전국적으로도 따라잡을 자가 없는 존재였음을 확인시켰다.
일제강점기 초 일제는 우리 전통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남사당놀이를 전국적으로 금기시 했다. 이때 진위 출신 유세기가 안성경찰서에 경부로 재직하면서 유일하게 안성경찰서에서만 남사당놀이를 허가해줬다. 전남 강진군과 황해도 구월산, 경남 남해군 등 전국적으로 산재해있던 사당패들은 휴면상태로 고사 직전에 있었으며, 유세기가 사당패를 허가해준다는 소식을 들은 예인들은 평택과 안성지역으로 집중 이주하게 됐다. 이 때문에 평택과 안성은 진위와 청룡사를 본거지로 해 사당패의 중심지가 됐던 것이다. 이로 인해 평택·안성·화성 등지의 농악은 이른바 경기농악의 전형적인 특징인 두레와 걸립의 특징을 갖게 됐으며, 이러한 웃다리농악은 경기도와 충청도 전역, 강원도 서부 등 매우 넓은 지역으로 분포되어 갔다.
 

이승만 정부 때 평택농악패 구성
1958~59년 2년 연속 우승 차지

▲ 평택농악 서울 광화문광장 공연
사당패는 평택의 소사뜰·오성뜰, 진위 장안뜰, 성환, 둔포뜰, 멀리는 예산, 아산 삽교, 당진 합덕뜰에 이르기 까지 놀이판을 펼쳤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등살에 전국적으로 자취를 감춘 가운데도 그 명맥을 유지한 것이 바로 평택걸립패였다. 걸립패는 교량·학교·관공서 등을 건립하는데 유용하게 활용됐고, 또한 예인들로서는 생계유지의 수단이기도 했다.
평택농악은 이때부터 두레풍물과 걸립풍물굿을 가장 잘 계승한 웃다리지역을 대표한 풍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두레농악에서 하던 지신밟기·두레굿과 더불어 난장굿·절걸립·촌걸립 등 걸립패에서 하던 전문연희패적 요소가 함께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는 평택 팽성읍 원정리 출신 최은창이 전문 연희패에서 활동했고 초기 구성원들이 서울·경기남부·천안·공주 지역에 흩어진 명인들로 구성돼 전문 연희패적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즉, 평택농악은 팽성읍 평궁리 마을의 두레농악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평택의 두레농악을 대표한다기보다는 경기·충청지방 전문 연희패의 가락과 판제를 계승한 웃다리농악이라고 할 수 있다.
‘평택농악平澤農樂’ 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6·25한국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 시절 대통령 생일을 기념해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였다. 평택농악의 명인 최은창崔殷昌은 당시 평택군의 요청으로 농악패를 구성해 ‘평택농악’ 이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나갔다. 평택농악은 지금의 광화문인 중앙청 앞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1958년과 1959년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평택농악의 이름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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