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성읍 평궁리는 평택농악의 토양

최은창의 살아있는 예술혼藝術魂

웃다리농악을 키우다

 

 

▲ 평택농악 두레굿 길놀이(현덕면 기산리 기산앞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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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대회 출전을 계기로
1985년 12월 상쇠 최은창과 수법고 이돌천이
평택농악의 최고봉인 예능보유자가 됐으며,
이듬해인 1986년 12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의 보유단체로
평택농악보존회가 지정받게 됐다.
평택농악이 명실 공히
전통적인 웃다리농악의
가락과 판제를 이어온 것으로
인정을 받은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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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1월말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에서 열리는 ‘제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우리나라에서 신청한 ‘농악’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여부가 판가름 나게 된다. ‘농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경우 우리나라는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첫 등재된 이후 판소리-강릉단오제-강강술래-남사당놀이-영산재-제주칠머리당영등굿-처용무-가곡-대목장-매사냥-줄타기-택견-한산모시짜기-아리랑-김장문화에 이어 국내에서는 17번째, 국제적으로는 88개국 297번째로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예를 안는다. 문화재청이 지난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처음 제출한 농악은 ‘평택농악’을 비롯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6곳과 시·도 지정 무형문화재 14곳 등 모두 20곳의 농악이 동시에 등재 신청됐다. 특히 평택농악은 경기·서울·인천·충청권 전역과 강원 일부지역을 대표하는 웃다리농악으로 전체 인구의 60%인 3100만 명을 아울러 우리나라 농악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평택시사신문>은 두레굿과 걸립굿을 모두 수용해 역동성과 연희성이 뛰어나 세계인에게 사랑받고 있는 평택농악의 역사와 명인·연희·세계화·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발전 과제에 대해 11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 평택농악 당산굿 고사(1965년)
▲ 전국대회 출전에 앞서 평택군청 광장에서의 출정공연(1980년)
최은창 명인에 의해 시작된 ‘평택농악’
새마을운동으로 고사 직전에 놓여
웃다리농악을 대표하는 평택농악의 근거지이며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평택시 팽성읍彭城邑 평궁리平宮里는 평택시가지에서 남서쪽으로 2㎞쯤 떨어져 있는 평야지대에 자리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이 마을에서는 옛 부터 지신地神밟기와 두레굿 등 여러 농악을 세게 쳤다.
팽성읍 평궁리가 웃다리농악의 총본산이 된 데는 ‘평택농악平澤農樂’ 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도록 하고 이를 발전시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의 반열에 오르게 한 웃다리농악 명인 최은창崔殷昌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은창의 출생지는 팽성읍 원정리로 평궁리와는 4㎞ 떨어진 곳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평궁리로 이주해왔다. 예능적 감각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기 시작한 최은창은 마을 두레패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마을단위에서 벗어나 촌걸립을 하는 전문연희패의 일원으로 절걸립패에 몸담았으며 성장하면서 독립해 직접 절걸립 행중을 꾸려 활동해왔다.
이후 최은창을 주축으로 한 평택농악패가 꾸려지고 이들은 절걸립으로 근근이 유지되어오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평택농악 명인 최은창은 고향 평궁리에서 농사일을 하는 한편 간간히 지금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의 전신인 ‘민속극회 남사당’ 활동을 해왔다.
마을마다 전해 내려온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가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위축되는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해온 최은창은 평궁리에서 다시 평택농악을 부활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대외적 공연활동에 주력하면서 잊혀져가는 고사소리 채록과 복원에 힘썼다.

 


▲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한 평택농악 단원들(제주도)
전국민속예술경연 출전, 특별상 수상
1985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평택농악이 현재와 같은 편제를 갖춘 것은 1980년대 초부터다. 당시 상쇠 최은창崔殷昌과 수법고 이돌천李乭川 등 명인들은 평택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 살면서 농악을 쳐왔다. 1980년에는 평택군과 평택문화원에서 최은창을 중심으로 평택·안성·천안·서울 등지에서 활동해온 전문연희패 출신들과 평택지역에서 이름이 나 있던 사람, 그리고 평궁리 마을사람들로 편성된 평택농악팀을 만들어 그해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참가해 공연했다. 그러나 공연 수준이 다른 시·도 팀에 비해 월등하다는 이유를 들어 주최 측에서 대상을 주지 않고 예정에 없던 상을 급조해 ‘특별상’을 줬으며, 이에 평택농악 단원들과 경기도 공무원들이 반발하자 이를 달래기 위해 제주도지사가 직접 나서 제주도 일주 관광을 시켜주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 했다.
이를 계기로 1985년 12월 상쇠 최은창과 수법고 이돌천이 평택농악의 최고봉인 예능보유자가 됐으며, 이듬해인 1986년 12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의 보유단체로 평택농악보존회가 지정받게 됐다. 평택농악이 명실 공히 전통적인 웃다리농악의 가락과 판제를 이어온 것으로 인정을 받은 계기가 된 것이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농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우두머리인 상쇠의 필요에 의해서 인근 시·군에서 농악 한 자락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급조한 농악패를 만들어 두레굿이나 걸립굿을 펼치곤 했다. 때문에 농악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팔려간다”는 말이 전해 내려와 지금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평소에는 각자 마을 두레패에 소속돼있긴 하지만 공연을 주선한 농악패의 일원으로 연희해왔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평택농악을 거쳐 간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팽성읍 평궁리 평택농악전수회관과 멀리 보이는 동안들
자체 토지마련, 국·도·군비로 회관지어
팽성읍 평궁리, 평택농악의 본산 돼
평택농악의 유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평택지방은 넓은 소사벌을 배경으로 자연히 농업이 발달했고, 두레에 의한 마을단위 풍물도 발달했다. 한편, 웃다리지역에서는 보다 전문적인 풍물패가 형성돼 나중에는 풍물 자체를 업으로 삼는 직업적인 유랑 연희패로 변하게 됐다.
이런 배경에서 형성된 평택농악은 따라서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최은창이 평생 거주해 온 평궁리, 넓게 잡아 평택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던 마을 두레패 성격의 농악이다. 또 하나는 최은창이 성인이 된 이후 넓은 지역을 유랑하면서 활동하던 전문연희패 성격의 농악이다. 평택농악이 두레패 성격에만 머물렀다면 웃다리지역을 포괄하는 농악으로서의 대표성을 갖지 못 했을 것이며, 전문연희패의 성격만 가지고 있었다면 농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두레농악의 대동적 신명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평택농악은 그 형성과 정상 두레패의 전통, 웃다리지역 전체를 넘나들던 전문연희패의 전통을 함께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평택농악은 마을 두레패의 성격보다는 전문연희패의 성격이 강하다. 이는 평택농악의 예능보유자였던 최은창이 주로 전문연희패에서 활동했다는 점과 평택농악의 구성방식 그리고 구성원의 주요 인맥에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1985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이후 수많은 공연에 초청받은 평택농악보존회는 단원들이 공연에 참여해 받은 출연료를 매회 조금씩 모으는 등 보존회 자체의 힘으로 평궁리에 평택농악의 터전이 될 토지를 구입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다 정부와 평택군의 지원으로 1990년 5월 평택시 평궁2길 15(팽성읍 평궁리 242-1호)에 ‘평택농악전수회관’을 건립했으며, 2007년 7월 다시 평택농악의 정신적 지주支柱였던 최은창의 호를 딴 ‘예운관藝雲館’을 신축해 꾸준한 전통보존과 강습·공연활동을 통해 평택농악의 맥을 잇기 위해 힘써오고 있다.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면서 최근에는 행정적인 지원이 확대돼 평택농악의 전통 보존과 발전적 계승을 위한 전승활동을 체계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글·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부사장·평택농악보존회 발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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