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9월 14일

40여 척이나 높은 다리 공사
일당 70전, 노동자 이성오 씨


 
“하루의 七十전씩 받고 四十여 척이나 되는 높은 곳에서 일을 하다가 실수하여 떨어져 무참하게도 죽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적을 여주군 가남면 상활리(麗州郡 加南面 上活里) 이성오(李成五)로 (중략) 지난 十四일 四十여 척이나 되는 무시무시한 높은 곳에 올라가 말뚝을 박다가 오전 十一시경에 떨어져 졸도하여 즉시 평택의원(平澤醫院)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아무 효과 없이 오후 三시에 절명되었다 한다.”(동아일보 1933년 10월 16일)

일제강점기 하층민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그러나 농촌을 떠난 이들이 토목공사장의 노동자로 변신하는 일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토목공사는 일반적으로 조(組)라고 불리는 토목공사 청부업체에 맡겨졌고 이들이 필요한 만큼의 노동자들을 일용노동으로 모집해 공사를 수행해나갔다. 토목공사장 막일꾼은 사실상 식민지 시기 빈민의 일부였다. 통복천 교량공사에서 추락사한 이성오(李成五)도 식민시기 가장 빈한한 계층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통복천은 평택을 대표하는 하천 중의 하나다. 지금은 통복천 사이를 두고 체육시설 등이 마련돼 시민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지만 예전에는 수심도 깊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했다. 때문에 종종 자살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통복천을 지나는 통복교는 일제강점기 평택역 앞과 도심지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도로였다. 그러나 큰 비가 오거나 홍수 등으로 수해가 날 때면 물에 잠기거나 훼손이 되곤 했다. 1933년 들어 통복교를 제대로 설치하기 위해 공사를 하였는데 당시 ‘경성중앙토목공사’가 이를 맡았다. 예나 지금이나 토목공사는 일정한 조를 짜서 했는데 이성오를 인부로 고용했다.
이성오는 여주군 가남면 상활리 출신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정한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던 이성오는 결국 통복교 공사를 맡은 경성중앙토목공사의 청부인부로 고용되었다. 통복교 공사는 40여 척(12m)이나 높은 매우 위험한 공사였다. 이성오는 통복교 교량공사 꼭대기에서 말뚝을 박다가 9월 14일 오전 11시 실수로 떨어진 것이다. 즉시 평택의원으로 옮겨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결국 이날 오후 3시에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당시 공사장 노동자의 일당이 70전이었으며 통복교의 높이가 꽤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평택에 ‘평택의원’이 운영되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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