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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2. 길과 주막 그리고 사람들>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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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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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남대로 샛둑거리구간(진위면 마산2리)

 

 

삼남대로 큰길에 자리 잡았던 샛둑거리주막
마을이라야 대 여섯 집뿐이었지만
삼남을 오가는 행인들로 늘 붐볐다

 

 사연을 간직했던 샛둑거리주막은
해방 전후 문을 닫았다.
마을 이름이 마산1·2·3리로 바뀌면서
샛둑거리라는 지명도 잊히고 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새 주막이 들어섰고
원주민이 떠난 자리에
새 주민들이 자리를 잡았다.
새 주민의 선두주자는
30여 년 전 통합경로당 옆에
개업한 통막걸리집이다.
샛둑거리 통막걸리집은
경로당 노인들 뿐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의 쉼터였다.

 

 

 

3- 샛둑거리주막-그 시절의 주모는 아직도 건재하신가?

   
▲ 샛둑거리와 통막걸리주막 풍경
주막은 ‘길의 정거장’이었다. 삼남대로처럼 큰길가의 주막은 왕도 쉬었다가고 고관대작과 부상대고들도 머물다 갔다. 지역과 지역,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던 작은 길목에는 민중들의 주막이 있었다. 민중들은 주막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허기진 배를 채웠으며 세상소식을 접했다. 때론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의장소가 될 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옛 주막에는 사람냄새, 다양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잊혀져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 우리의 자화상이며 그리움이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8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그리고 주막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 놓으려 한다. 독자들의 애정과 관심을 기대한다. - 편집자 주 -

■ 조선후기에 바뀐 삼남대로
   
▲ 샛둑거리주막거리에 둥지를 튼 우대식 시인 부부
   
▲ 삼남대로에 위치한 이태용 김은숙 부부화가의 집(진위면 마산2리)
오래 전부터 ‘오리골’이라는 지명이 궁금했다. 독곡동의 작은 자연마을에 불과하지만 분명 뭔가 있을 법한 지명. 그러던 중에 조선 초에는 삼남대로가 오리골을 경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종 대의 명재상 맹사성이 오리골과 장호원을 지나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민생에 폐해를 준다고 하여 진위면 마산1리 오룡동으로 우회했다는 설화, 진위면 신리 장호원에 있었다는 ‘인침담 전설’이 그 같은 사실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많고 많은 지명중에 하필이면 오리골이라고 불렀을까. 2001년 발행된 평택시사에는 ‘오리가 많이 살아서’라고 해석했지만 지형적으로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이 ‘오리정(五里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관아에서 오리(五里)쯤 떨어진 곳에 작은 누정을 세워 찾아온 손님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는데 오리골이 바로 그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던 이몽룡도 남원의 오리정에서 춘향이와 석별의 정을 나눴다고 하므로 나의 추측은 과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오리골은 진위면 봉남리의 진위현 관아에서 직선으로 3km(조선시대 5리) 거리. 하지만 누대를 오리골에서 살아온 토박이들조차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며 고개를 흔든다. 이거 어찌된 일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 삼남길 마산2리 숲안말 구간
필자는 그 해답을 조선후기의 간척과 개간에서 찾는다. 개간되기 전 진위천으로는 바닷물이 유입되었고 하천 폭도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그 당시 삼남대로는 진위면 견산리를 거쳐 진위천을 건넜고, 신리 장호원-오룡동(오리골)-동막 백현원-대백치 방면으로 나갔다. 진위천 변의 습지가 개간된 것은 17~18세기경이다. 개간된 들판은 장호들이라고 불렀다. 장호들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봉남목교 못미처에는 새로 둑이 쌓였고 진위면 신리 장호원 옆에 있었다는 인침담도 매립되었다. 다리 너머에 새로 둑이 쌓이고 개간이 되면서 장호원을 거쳐 오룡동으로 돌아가던 삼남대로는 샛둑을 지나 소백치로 넘어가게 되었고 샛둑거리에는 주막이 생겼다. 마산3리 샛둑거리 주막이 그것이다. 샛둑거리 주막은 19세기 중·후반에 편찬된 읍지邑誌에는 ‘신제점’이라고 표기하였다. 하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샛둑거리나 신제新堤나 그놈이 그놈이니까.

■ 내 남편도 샛둑거리주막 단골
   
▲ 삼남대로에 위치한
이태용 김은숙 부부화가의 집
(진위면 마산2리)
조선후기 샛둑거리는 신제리라고 불렀다. 마을이래야 대 여섯 집뿐이었지만 삼남을 오가는 행인들로 늘 붐볐다. 지금도 마산3리 샛둑거리에는 ‘통막걸리집’이 있다. 상호도 없어 그냥 통막걸리집으로 부른다. 마산리, 은산리 일대에는 ‘샛둑거리주막’ 말고도 은산4리 말미(미촌)에 ‘방죽머리주막’, 은산리 방촌에 ‘산뒤주막’이 있었다. 하지만 샛둑거리주막이 다른 주막들과 다른 것은 이곳이 삼남대로의 요지여서 급이 달랐다는 사실이다.
17살에 혼인하여 줄곧 마산3리 왜골마을에서만 살아온 전순하(88세·여)씨는 해방 전 샛둑거리에는 다섯 집이 살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 가운데 주막은 두 집(김춘O 씨와 이수O 씨 부친이 운영하던 주막) 뿐이었다. 주막집들은 방 두 개에 부엌 한 칸으로 이뤄진 작은 초가집이었다. 이 씨네 주막은 국밥도 팔았지만, 주로 밥보다는 막걸리를 팔았다. 주모는 손님이 막걸리를 주문하면 미리 함지박에 담가두었던 두부를 꺼내 칼로 썩썩 썰어서 신 김치와 함께 내놨다. 두부김치와 함께 인기가 많았던 것은 부침개였다. 때때로 두부김치에 막걸리 한 잔 걸치고 노름판을 기웃거리다 시비가 붙기도 하였다. 술집 주인은 술도 잘 팔아야했지만 싸움말리는 솜씨와 외상값 받아내는 수완이 있어야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술 잘 팔고 외상으로 밑지면 장사 헛짓했다고 투덜댔다. 돈 좀 있는 부자들은 봉남리로 나갔다. 송탄에 미군기지촌이 형성된 뒤로는 기지촌 앞으로 진출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해방 뒤 봉남리에는 양조장이 생겼다. 양조장 막걸리는 밀을 주원료로 하여 맛은 떨어졌지만 식량을 아낀다며 밀주단속을 하는 현실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진위양조장의 술은 샛둑거리에도 배달되었다. 1960~70년대 막걸리는 나무로 만든 둥그런 술통에 담아 날랐다. 술통이 배달되면 큰 술항아리에 쏟아 놓고는 되로 퍼서 팔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막걸리 한 통 주세요” 보다는 “막걸리 한 되 주세요”가 일상적이었다. 
 
■ 샛둑거리의 새로운 터줏대감들
   
▲ 소백치와 대백치 사이의 동막마을
   
▲ 삼남대로 소백치 옛길
전순하 씨 댁은 살림이 요족饒足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창고에 벼가 그득해서 동네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남편은 지나가는 거지들까지 거둬 먹일 정도로 마음이 넉넉했다. 전순하 씨는 농기구를 잃어버려도 거지들이 주워 다 주었을 정도였다고 자랑했다. 농한기 샛둑거리주막은 남편의 놀이터였다. 인심이 넉넉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끌어들여 먹고 마시기를 즐겨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먹고 마신 뒤에는 곳간에서 벼 몇 섬이 사라졌다.
한국전쟁 뒤 삼남대로는 큰 길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하북리 쪽으로 국도 1호선이 건설되면서 더 이상 소백치, 대백치를 넘는 삼남대로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장에 갈 때만 삼남대로를 넘었다. 마산3리에서 서정리장까지는 10리였다. 서정리장에 가려면 마산2리 수촌(숲안말) 서쪽을 넘어 오룡동과 송북초등학교를 거쳐 국도 1호선을 따라 갔다. 평택장을 갈 때도 비슷했다. 20리 거리에 있던 오산장은 삼남대로를 이용하는 것이 빨랐다. 전순하 씨는 오산장을 갈 때 봉남리 뒷길을 넘어 가곡리로 가서 백두고개를 넘었다고 말했는데, 이 길은 봉남리-가곡리 구간을 제외하고는 삼남대로와 같았다.
면소재지였던 진위면 봉남리를 갈 때는 봉남교를 건넜다. 봉남교만 건너면 진위장이나 진위초등학교가 지척이었지만 때때로 장마가 지면 문제가 되었다. 실제로 봉남교는 1946년 병술년 물난리 때 떠내려갔다. 그래서인지 마을 토박이 안미O(53세·여) 씨와 해방동이 안석준(69세·남) 씨는 ‘아나방다리’만 기억했다. 징검다리 위에 구멍이 뚫린 긴 철판의 아나방을 놓은 간이다리가 그것이다. 아나방다리는 나름 훌륭한 다리역할을 하였지만 그것도 물이 불어 오르면 속수무책이었다. 그럴 때면 오빠가 무동을 태우고 동생을 건너 주기도 했고, 10리나 떨어진 진위면 신리 앞 진위교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 2013년 경기도가 새로 조성한 삼남길 소백치구간
사연을 간직했던 샛둑거리주막은 해방 전후 문을 닫았다. 마을 이름이 마산1리·2리·3리로 바뀌면서 샛둑거리라는 지명도 잊히고 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새 주막이 들어섰고 원주민이 떠난 자리에 새 주민들이 자리를 잡았다. 새 주민의 선두주자는 30여 년 전 통합경로당 옆에 개업한 통막걸리집이다. 통막거리집은 경로당의 노인들 뿐 아니라 샛둑거리를 지나가는 행인들의 쉼터였다. 그 옆의 막걸리집은 15~6년 전 통막걸리집 사위였던 유수O(58세) 씨가 문을 열었다. 통막걸리집과 유 씨는 평택에서 생산하는 이화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1980년대 진위양조장이 문을 닫으며 나타난 현상이라고 하였다.
통막걸리집 옆에는 진위고등학교 교사인 시인 우대식(50세)이 살고 있다. 우대식 시인은 원주 사람이지만 부인이 마산3리 왜골 사람이다. 우시인 집 개울 건너편에는 부부화가 이태용·김은숙 부부의 갤러리가 있다. 새로 정착한 이들은 정겨운 문화벨트를 형성하고 호형호제하며 살고 있다. 우 시인의 집 테라스에서 담소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와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강이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굽은 곳에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시를 펼쳤다. 굽은 곳에 머물러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민중들의 생명력,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는 따뜻한 시선이 정겹다.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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