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가 있어 힘든 날도 이겨냈어요"


큰 꿈과 포부 안고 평택농악보존회 입단
부부와 무동 아들까지 대 잇는 농악가족


 
전통이 사라져가는 요즘에도 전통을 고수하며 그 속에서 꿋꿋이 자부심을 지켜가는 젊은이들을 만나는 것은 그 지역의 튼실한 뿌리와 함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어서 내심 반갑다.

어려운 환경, 농악에 빠져들어
“어릴 때부터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웠어요. 초등학교 때는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했고 항상 동생을 챙기며 어린나이에 집안일까지 도맡아야 했죠. 중학교에 올라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그나마 제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특별활동 시간에 풍물반에서 장구를 치는 것이었어요. 그때만큼은 악기를 통해 기쁨도 슬픔도 제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었거든요”
평택농악보존회 전수자 문연주(32) 씨는 장구를 치게 된 계기를 묻자 담담하게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말을 멈춘다. 많은 악기 속에서도 자신만의 가락을 연주하며 맛깔스런 화음을 만들어내는 장구처럼 어린 시절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 문연주 씨 역시 어린 나이에도 야무지게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던 모습이 이야기 속에서 역력하게 느껴진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형편이 더 힘들어졌을 때도 악기를 놓지는 않았어요. 아버지가 높은데서 떨어져 중환자실에 계실 때 동생과 번갈아 병원에서 밤샘간호를 하면서도 틈만 나면 장구를 치러 가곤 했으니까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일반대학보다 풍물로 대학에 진학하자고 결심했죠”
문연주 씨는 일찍 대학을 졸업해 일을 하며 동생을 공부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당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그때 선택한 것이 2년제 대학인 서울예술대학교 국악과였다.

평택농악보존회 단원 ‘자부심’
“집이 있었던 인천에서 학교가 있던 안산까지 왕복 6시간을 버스와 전철로 이동해야 했지만 이를 악물고 학교를 마쳤어요. 학교 다닐 때는 장학금도 받고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집안 생활비를 댔고 졸업 후에는 남동생 학비도 도와줬죠”
문연주 씨는 졸업 후 ‘안성시립 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에 입단하며 사회생활에 첫 발을 내딛었다. 당시는 안성에서 첫 상임단원을 선발할 때였고 수습단원을 거치며 그곳에서 북과 징을 쳤다. 그리고 직장을 옮겨 현재의 남편을 만나게 된 오산 풍물단 ‘사물진천하’에서 활동하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2006년 ‘평택농악보존회’ 상임단원 선발에 응시하며 평택에 정착했다.
“당시 제 자존감은 최고였어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평택농악보존회 단원이 된다는 사실이 제게 엄청난 우월감과 자신감을 안겨줬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면에 책임감이 우선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됐죠. 보존회의 역할은 국가문화재의 위상을 지키는 일인데 보존해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이 쉽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문연주 씨는 보존회 상임단원 중 처음으로 결혼과 출산을 경험한 단원이었다. 초기의 여느 단체들이 그렇듯이 이렇다 할 세부규정이 없어 임신 9개월까지 부른 배를 지탱하며 연습과 공연에 빠짐없이 참가해야 했고, 아이가 아파 병원에 있을 때는 단원과 엄마 역할 사이에서 수없이 고민해야 했다고.

부부는 ‘농악’ 아들은 ‘무동’
“남편도 농악을 하는 사람이라 서로 이해의 폭이 넓어서 좋아요. 공연을 갈 때도 아직 어린 아이들 때문에 힘들지만 서로 배려하게 되거든요. 지금은 아들이 남편을 따라다니며 무동을 하고 있는데 단원들이 안전을 위해 얼마나 많이 연습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크게 걱정은 안 해요. 시부모님들도 전국으로, 해외로 여기저기 바쁘게 공연 다니는 며느리를 많이 이해해 주시니 늘 감사한 마음이죠”
문연주 씨는 본인 역시 농악에 대한 애착이 크지만 자신보다는 남편이 더 큰 농악인으로 우뚝 섰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려준다. 그리고 자신은 틈틈이 현재 시부모님들이 운영하는 방앗간에서 전통 떡이나 장 만들기를 배워 가업을 잇고 싶다고 말한다. 농악이나 전통음식이나 전통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맥락은 같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맑은 정신으로 바르게 행동하고 건강하게 살자는 것이 어린 시절 저희 집 가훈이었어요. 그땐 참 촌스러운 가훈이라고 생각했는데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그렇게만 살면 인생을 참 잘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전 앞으로도 평택농악의 맥을 잇는 사람으로, 그리고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로 그렇게 잘 살아가고 싶어요”
평택농악 전승을 위해 매주 몇차례씩 포승읍 원정초등학교에 강습을 다니면서도 집에서는 일곱 살, 세 살 아이를 야무지게 키워내는 문연주 씨, 훗날 전수조교가 되고 예능보유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그녀는 농악 공연에서도 신명나는 장구가락을 다부지게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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