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삼남대로가 지났던 진위면 봉남리와 봉남교

 

 

근대전후 봉남리는 사람과 물산이 많이 모이는
대처大處로 상업이 발달했으며
진위읍장의 개시일은 1일과 6일이었다

 

조선시대 진위면 봉남리까지는
서울서 120리·수원서 50리였다.
당시 장정 한 사람이 하루 80리
또는 100리를 걸었다고 하므로
대략 서울에서 하루 반,
수원에서 한나절거리다.
서울에서 정오쯤 출발하였다면
과천에서 하루를 묵고
봉남리에서도 하룻밤을
묵었을 것이다.
여행자의 필요가 있는 곳에는
주막이 형성되기 마련.
조선시대 고지도에는 봉남리에
'진위주막'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 진위면 봉남리 전경(1960년대)

▲ 진위면 봉남1리 진위읍내장터 일대

 

- 진위주막-큰길가는 사람 여기 안 들르면 간첩이지

주막은 ‘길의 정거장’이었다. 삼남대로처럼 큰길가의 주막은 왕도 쉬었다가고 고관대작과 부상대고들도 머물다 갔다. 지역과 지역,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던 작은 길목에는 민중들의 주막이 있었다. 민중들은 주막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허기진 배를 채웠으며 세상소식을 접했다. 때론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의장소가 될 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옛 주막에는 사람냄새, 다양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잊혀져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 우리의 자화상이며 그리움이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8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그리고 주막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 놓으려 한다. 독자들의 애정과 관심을 기대한다. - 편집자 주 -

 

■ 봉남리는 평택지역 교통의 중심

▲ 진위주막이 있었던 봉남1리 주막거리 마을 골목길
▲ 진위주막이 있었던 봉남1리 주막거리 마을 골목길

어릴 적 우리 집 옆에는 주막이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그 집을 ‘고모네 주막’라고 불렀다. 시집갔다가 불임不姙 때문에 소박맞고 돌아온 주모가 희야(가명) 누님의 고모였기 때문이다. 주막집은 성어기에는 뱃사람들의 정거장이었지만 겨울 휴어기休漁期에는 동네 남자들의 카페였고 놀이터였다. 정월, 주막 마당에서는 술내기 윷놀이를 하거나 풍물을 치며 놀 때가 많았다. 동네에서 한가락씩 한다는 고수들끼리 맞붙은 윷놀이는 큰 볼거리였다. 윷가락이 하늘로 올라갔다가 떨어질 때마다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탄식, 그 중심에 유식 씨 아버지가 계셨다. 유식 씨 아버지는 어린 우리들에게도 경이로운 존재였다. 말을 거칠게 내뱉거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고 풍물 치는 솜씨나 윳놀이가 남달랐다. 한 판 신명나게 놀고 난 뒤에는 술상이 나왔다. 술상이라야 두부 한 모에 신김치 뿐이었지만 배고프고 술 고픈 동네 남정네들의 가슴을 달래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시골 벽지라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주막들은 대부분 이랬다. 큰길가의 주막에는 오가는 행인들이 들끓었고 큰 장시場市 근처의 주막에는 장사치들이 득실거렸다. 근대전후만 해도 진위면 봉남리는 평택지역 정치·행정·교통의 중심이었다. 근대교육이나 종교도 봉남리에서 시작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위振威’를 대표지명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곳이 평택지역의 중심이었음을 말해준다.
옛길은 봉남리에서 잠시 머문 뒤 삼남지방과 주변 지역으로 갈라졌다. 조선시대 과천과 수원도호부를 거쳐 병점과 오산을 지나온 삼남대로는 진위현의 읍치邑治 봉남리에서 머문 뒤 진위목교를 건너 소백치를 넘었다. 진위면 마산리 수촌(숲안말)과 오룡골, 지산동 숯고개(쑥고개)를 넘나들었던 길은 진위현 해창海倉이 있었던 고덕면 해창리 해창포까지 연결되었다. 해창길은 세곡의 운송과 관련되어 매우 중요시되었다. 곡물의 운송이 빈번하다보니 숯고개와 진위천 수로가 만나는 신장동에는 장시(場市)가 형성되었다. 이밖에도 진위면 봉남리에서 하북리를 거쳐 서탄방면으로 나가는 길, 동천리를 거쳐 용인방면으로 나가는 길, 은산리를 거쳐 도일동과 원곡방면으로 나가는 길도 민중들의 삶과 깊이 관련되었던 길이다.
근대전후 봉남리는 대처大處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과 물산이 많이 모이는 대처에는 상업이 발달하기 마련이다. 진위읍장振威邑場은 진위관아의 동남쪽(진위우체국 남쪽)에 있었다. 개시일開市日은 1일과 6일이었다. 그러다가 근대 이후 경부선 오산역과 서정리역전에 오산장, 서정리장이 개장開場되고, 일제 말 가마니 공출·식량공출·과일의 집산지로 번성했던 진위면 하북리에 장場이 서면서 폐장廢場되었으며, 한국전쟁 뒤 다시 개장하였지만 거래가 신통치 않으면서 다시 폐장되었다.

 

 


■ 진위주막은 끈 없는 양반들과 서민들의 쉼터

▲ 봉남리 진위천 변 관방제림(2001년)
조선시대 진위면 봉남리까지는 서울에서 120리, 수원에서 50리였다. 당시에는 장정 한 사람이 하루 80리 또는 100리를 걸었다고 하므로 대략 서울에서 하루 반, 수원에서 한나절거리다. 서울에서 정오쯤 출발하였다면 과천에서 하루를 묵고 봉남리에서도 하룻밤을 묵었을 것이다. 여행자의 필요가 있는 곳에는 주막이 형성되기 마련. 조선시대 고지도에는 봉남리에 ‘진위주막’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1899년에 편찬된 진위현 읍지邑誌에 “진위주막은 홍문紅門 앞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진위현에는 객사와 향교 앞에만 홍문이 있었으므로 진위주막은 객사 앞 홍살문 밖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2009년에 인터뷰했던 봉남리 토박이 안병국(73세) 씨는 봉남1리 신우균 씨 댁이 옛 주막이라고 고증考證하였다. 신우균 씨 댁은 진위면사무소 남쪽 주막거리에 있으므로 대략 옛 기록과 비슷하다. 또 2006년에 인터뷰한 전창종 씨 모친(당시 80대 후반)도 진위초등학교 남쪽이 주막거리라고 말하여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옛 주막은 마방집이라고 불렀다. 마방집은 초가집으로 안채와 바깥채가 있었다. 옛날에는 안채는 주인이 살았고 바깥채에는 봉놋방과 마방이 있었던 가 본데, 안병국 씨 어린시절에는 마방과 봉놋방은 없이 동네사람들에게 술만 팔았다고 말했다. 주막이 안채와 바깥채로 구별되고 마방馬房이 있었다면 큰 주막이다. 통상 우마牛馬는 지체 높은 양반이나 장사치들이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위주막에 묵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한양에서 남행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자. 통상 전·현직 관원이거나 유력 가문의 자손이면 진위객사에서 수령의 극진한 환대와 관기官妓의 접대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의 녹祿을 먹지 못하고 든든한 뒷배마저 없었던 양반들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며, 과거에 낙방한 과객科客이거나 장사치, 일반 서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성종 때의 대문호 서거정은 진위객사의 중수 기문을 썼고, 조선후기의 대학자 농암 김창협은 “난간 위엔 솔솔 스치는 바람, 사방 산 빛 창문으로 비쳐드는데, 눈 들어 산야 정취 훑어보노라(중략)”라며 진위객관의 풍경을 노래했지만, 어디에서도 진위주막과 관련된 글 한줄, 시 한 수를 찾아보기 어렵다. 

 

■ 기억 속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진위주막

▲ 조선시대 봉남목교가 있었던 진위면 봉남교 일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봉남리 경로당에 가면 진위읍장이나 주막과 관련된 이야기가 흔했다. 지금은 쇠락해버린 심순택 가문의 산지기가 한 때는 열 집이 넘었으며, 한식 때 송편 다섯 가마니에 소 한 마리를 잡아 제를 올렸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황언년(여·2006년·82세) 씨에게서는 ‘신혼 때 심정승 댁 큰 마님이 일을 못한다며 혼내는 바람에 부아가 치밀어 집으로 돌아왔더니 남편이 혼내더라’는 무용담, 일제강점기 금릉학원 이야기며,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인민군을 폭격한다며 민가와 피난민들에게 포탄을 퍼부어 민가 열두 채가 불타고 피난민 십 수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진위천을 가로지르는 봉남교에 관한 사연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봉남교는 조선후기 고지도에는 ‘진위목교’라고 기록되었다. 진위목교는 진위천(조선후기에는 장호천)이라는 엄청난 도로교통의 장애물을 단숨에 건너 주었던 소중한 다리였다. 조선후기 한글소설 춘향전에는 이몽룡이 지나간 흔적만 남겼을 뿐인데도, 민중들이 ‘이몽룡과 춘향이가 다리 난간에 기대어 풍광을 감상하며 담배를 피웠다’는 스토리를 만들어낸 것도 진위목교가 가진 상징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위목교는 글자 그대로 ‘목교木橋’였다. 장마철이나 큰물이 나면 쉽사리 떠내려갔을 뿐 아니라 한 번 다리가 떠내려가면 삼남대로는 진위에서 멈춰서야만 했다. 다리가 떠내려가면 서민들은 썰물을 이용해서 바지를 걷어 올리고 건너면 그만이었지만 가마를 타고 다녔던 대갓집 부인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행인들의 애를 태웠던 진위목교는 근대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더구나 독곡동에서 하북리로 이어지는 국도 1호선에 ‘진위교’라는 콘크리트 다리까지 놓이면서 다리 건설의 필요성마저 사라져버렸다. 해방 직후 1946년 병술년 물난리 때에는 그마저 떠내려가 버려 한국전쟁 뒤에는 돌다리 위에 아나방(구멍이 뚫린 철판으로 만든 건축자재)을 놓고 넘어 다녔지만, 아나방다리는 장마철 물만 조금 불어나도 발목을 잡았다. 진위천에 아나방다리를 철거하고 콘크리트 다리를 놓은 것은 1970년대라고 한다. 다리가 끊기고 사람들의 왕래마저 끊어지면서 삼남로와 함께 번성했던 ‘진위주막’과 ‘진위읍내장’의 기억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자칭 토박이임을 자처하는 분들조차 진위장과 주막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억지를 쓰니 말이다.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부사장

 

 

▲ 조선시대 봉남목교가 있었던 진위면 봉남교 일대

▲ 진위면 봉남리 견산리 사이의 장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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