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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한국인의 혼 세계인의 흥 평택농악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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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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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농악은 웃다리풍물을 대표하는 농악으로
최은창·이돌천·김용래 예능보유자와
수많은 명인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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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창·이돌천·김용래·이성호 등
평택농악 명인들이 영향을 받은
걸립패의 최고 상쇠는 이원보였다.
중요한 걸립이나 규모 있는 대회에서는
이원보가 쇠를 잡았으며
장고잽이로는 송순갑·최은창·전사섭·
김복섭·민창렬·최상근 등이 이름을 떨쳤고
법고잽이로는 이돌천·박산옥·김용래가 활동했다.
고사꾼으로는 이덕영·최은창·김복섭이 유명했고
이중백·차기준 등도 이름을 올렸으며
호적으로는 정일파를 알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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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1월말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에서 열리는 ‘제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우리나라에서 신청한 ‘농악’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여부가 판가름 나게 된다. ‘농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경우 우리나라는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첫 등재된 이후 판소리-강릉단오제-강강술래-남사당놀이-영산재-제주칠머리당영등굿-처용무-가곡-대목장-매사냥-줄타기-택견-한산모시짜기-아리랑-김장문화에 이어 국내에서는 17번째로, 국제적으로는 88개국 297번째로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예를 안는다. 문화재청이 지난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처음 제출한 농악은 ‘평택농악’을 비롯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6곳과 시·도 지정 무형문화재 26곳 등 모두 32곳의 농악이 동시에 등재 신청됐다. 특히 평택농악은 경기·서울·인천·충청권 전역과 강원 일부지역을 대표하는 웃다리농악으로 전체 인구의 60%인 3100만 명을 아울러 우리나라 농악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평택시사신문>은 두레굿과 걸립굿을 모두 수용해 역동성과 연희성이 뛰어나 세계인에게 사랑받고 있는 평택농악의 역사와 명인·연희·세계화·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발전 과제에 대해 11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 1980년 제주도에서 열린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해 특별상을 받은 후 기념촬영

 

평택농악, 걸립패의 영향 받아
평택농악 체계화 장본인은 ‘최은창’
   
 
1945년 8·15해방 이후 웃다리풍물은 남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남사당 후예들과 이원보·송순갑 중심의 걸립패 출신들이 명맥을 이어왔다.
남사당은 남운형을 비롯해 조근영·송복산·김동현 등이 활동해왔고 그 뒤를 김재원·이수영 ·남기환·남기문·송철수·정일파·양도일 등이 이어왔다. 걸립패는 이원보·송순갑을 중심으로 활동해오다 최성구·이덕영·최은창·전사섭·이돌천·김복섭·박산옥·최상근·민창렬·김문학·김용래·이성호·임광식·이복용·김덕수 등이 뿌리를 전승해왔다.
최은창·이돌천·김용래·이성호 등 평택농악 명인들이 영향을 받은 걸립패의 최고 상쇠는 이원보였다. 중요한 걸립이나 규모 있는 대회에서는 이원보가 쇠를 잡았으며 장고잽이로는 송순갑·최은창·전사섭·김복섭·민창렬·최상근 등이 이름을 떨쳤고 법고잽이로는 이돌천·박산옥·김용래 등이 활동했다. 고사꾼으로는 이덕영·최은창·김복섭 등이 유명했고 이중백·차기준 등도 이름을 올렸으며 호적으로는 정일파를 알아줬다.
이 가운데 평택농악을 체계화시킨 장본인 최은창崔殷昌은 1914년 4월 18일 팽성읍 원정리에서 태어나 출생 직후 평궁리로 이주해 살아왔다. 최은창은 마을 둥기래패 상쇠에게서 꽹과리를 배워 16세 때 두레패의 꽹과리를 쳤으며 근방에서 젊은 쇠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평궁리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전문 연희패에 들어간 곳은 ‘이원보행중’이었다. 최은창은 26세 때 이원보 상쇠에게서 장구와 꽹과리를 배워 ‘이원보농악단’의 끝쇠를 쳤다. 이원보는 충청남도 부여 사람으로 일찍부터 풍물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풍물을 직업으로 삼아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전문 연희꾼으로 주로 안성 서상현의 집에 머물며 ‘서상현행중’의 상쇠를 쳤다.
최은창은 평택군의 요청으로 1958년과 1959년 ‘이승만대통령생신기념전국농악대회’에 ‘평택농악’ 기旗를 내세워 출전해 2년 연속 우승기를 차지했다. 평택농악은 30여명의 단원이 참여해 이원보가 상쇠를, 송순갑·최은창이 장고를, 이돌천·박산옥이 법고를, 김용래 등이 무동을, 이복용·김덕수가 사미를 맡았다.
최은창은 40세에 접어들면서 ‘남운룡악단南雲龍樂團’에 들어가 장구로 시작해 나중에는 부쇠를 쳤다. 48세 때에 절걸립패 상쇠로 나선 최은창은 북한산 태고사와 인천 연화사 등 수 많은 절 중수에 절걸립패를 이끌고 시주를 걷었다.
이후 최은창은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했다. 남사당에서는 남운형을 비롯해 최성구·양도일·송창선·지수문·송갑순·정일파 등 당대의 명인들과 함께 활동하며 가락 치는 솜씨에 깊이를 더하게 됐다. 송창선宋昌善은 평택군 서정리 출신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 예능보유자로 꼭두각시놀음 호적太平簫 명인이다.
최은창은 1980년 ‘경기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게 되며, 이를 계기로 1984년 12월 1일 상쇠로 평택농악 예능보유자가 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을 이끌게 되며, 평생을 풍물꾼으로 또 20여년 가까이 보존회장을 맡아 평택농악을 체계화시키는데 공헌해오다 2002년 작고했다.
최은창과 함께 평택농악을 이끌어 온 이돌천李乭川은 1919년 5월 26일 이천 장호원에서 태어나 10세 때 충청남도 천안으로 이주해 16세 때 쌍용마을 상쇠에게서 쇠를 배워 쳤고, 17세 때에는 충청북도 출신 박지삼에게 법고를 배웠다. 18세 때는 남운룡南雲龍에게서 법고를 배워 ‘남운룡농악단’의 법고수로 있었다. 그 뒤 평택농악과 천안농악에 적을 두었으며, 1980년 평택농악을 공식 결성할 때 합류해 1984년 12월 1일 상법고로 평택농악 예능보유자가 돼 활동해오다 1994년 작고했다.

 

   
▲ 평택농악 역대 예능보유자 최은창, 이돌천, 김용래 명인(왼쪽부터)
   
▲ 평택농악보존회 현판식에 참석한 평택농악 명인들

평택농악은 웃다리풍물 대표주자
평택농악 거쳐 간 전통예인 많아
현재 ‘평택농악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김용래金容來는 1939년 4월 19일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나 13살 때 용곡마을 두레패에서 무동으로 농악에 입문해 16세부터 대전 ‘송순갑행중’에서 2년간을 또 안성 ‘남운형행중’에서 무동으로 활동했다. 김용래는 18세 때부터 상모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의 스승이 바로 평택농악의 명인으로 같은 천안에 살던 이돌천이다. 또 천안에서 난장굿을 할 때는 최은창의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상모를 돌렸으며, ‘민속극회 남사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1982년 평택농악에 들어와 2000년 8월 22일 법고로 평택농악 예능보유자가 됐다. 2002년 평택농악전수회관이 위치한 팽성읍 평궁리로 이주해와 살면서 평택농악을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힘써왔다.
안성·천안·서울 등지에 거주하면서 전수교육조교와 이수자로 활동해온 평택농악 탄생기 명인들은 대부분 작고했다. 또 생존에 있는 명인들도 대부분 원로의 위치에서 평택농악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오고 있다.
방오봉은 1919년 팽성읍 대추리에서 태어나 16세부터 대추리 두레패에서 농악을 시작했으며 1980년 평택농악 결성 때부터 합류해 1991년 장고로 전수교육조교가 됐다.
손석건은 1919년 팽성읍 평궁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평궁리 두레패에서 활동해오다 1980년 평택농악 결성 당시 참여했다. 손석건은 평택농악에서 기수旗手로 활동했다.
김육동은 1928년 안성 공도에서 태어나 웅교리 두레패에서 농악을 시작했으며 최은창과 절걸립을 함께 하다 1980년 평택농악 결성 당시 참여해 2000년 법고와 무동으로 전수교육조교가 됐다.
정한모는 1928년 안성 공도에서 태어나 웅교리 두레패에서 농악을 치기 시작한 후 안성농악에서 활동하다 1985년 평택농악에 합류했다. 1987년 장구로 이수자가 됐다.
현재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8호 평택민요 농요 예능보유자인 이민조는 1930년 포승면 방림리에서 태어나 16세 때 마을에서 법고로 활동하다 이원보에게 쇠를 배웠다. 1980년 평택농악 결성 당시 참여해 1987년 이수자가 됐다.
유준은 1936년 안성군 공도면에서 태어나 웅교리 두레패에서 농악을 배운 후 1983년 평택농악에 합류해 1987년 북으로 이수자가 됐다.
황홍엽은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 평택 포승으로 이주해 홍원리 두레패에서 농악을 시작했다. 19세 때 마을의 할아버지로부터 호적을 배웠으며 1982년 평택농악에 합류한 후 최은창으로부터 호적을 이어받아 2000년 태평소로 전수교육조교가 됐다.
이성호는 1940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나 마을 두레패에서 농악을 시작한 후 서울로 올라간 뒤 최성구에게 상쇠와 부포놀이를 배웠다. 그 후 여러 행중에서 걸립을 하고 남운형행중에서도 활동했으며 최은창의 절걸립 행중에도 참여했다. 1989년 평택농악에 합류한 이성호는 상쇠와 부포놀이·고사소리에도 능했으며 2000년 상쇠로 전수교육조교가 됐다.
평택농악 법고잽이 이경일은 1942년 9월 21일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서울에서 지낸 후 17세 때 경기도 안성으로 이주해왔다. 안성 서운면 마을 두레패에서 상모를 처음 배워 19세때 ‘최은창행중’의 태고사 절걸립에 참여했다. 이후 ‘민속극회 남사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1982년 평택농악에 합류해 1987년 법고로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받았다.
이 밖에도 안성남사당 예능보유자인 김기복(1929년생), 서울 이영옥(1942년생), 천안 윤인수(1941년생), 팽성읍 평궁리 최종성(1954년생), 손기영(1962년생) 등이 평택농악에 몸담아 활동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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