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 명재상 맹사성孟思誠이 장호원을 지날 때
진위·양성고을 수령이 이를 알아보지 못하다
깜짝 놀란 ‘인침담印沈潭 전설’이 남아있다

 

장호원은 조선 초기에
설치된 역원驛院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삼남대로는
진위면 갈곶리 이방원과
신리 장호원·송북동 백현원을 거쳐
대백치(흰치고개)를 넘었다.
이익의 시詩에 따르면 이 교통로는
18세기 중반까지도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장호들과 건넌들이 개간되면서
장호원이 폐원廢院되고
진위면 봉남리 진위목교를 건너
마산리 신제점을 지나가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 옛 장호원 터로 추정되는 진위면 신리마을 원터방향

  

- 삼남대로 장호원길의 간이쉼터 밖술막

주막은 ‘길의 정거장’이었다. 삼남대로처럼 큰길가의 주막은 왕도 쉬었다가고 고관대작과 부상대고들도 머물다 갔다. 지역과 지역,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던 작은 길목에는 민중들의 주막이 있었다. 민중들은 주막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허기진 배를 채웠으며 세상소식을 접했다. 때론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의장소가 될 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옛 주막에는 사람냄새, 다양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잊혀져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 우리의 자화상이며 그리움이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8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그리고 주막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 놓으려 한다. 독자들의 애정과 관심을 기대한다. - 편집자 주 -

 

▲ 장호원이 있었던 진위면 신리마을
▲ 장호원이 있었던 진위면 신리에는 주막은 없고 신리슈퍼라는 구멍가게 하나 뿐이다

■ 잊혀져버린 장호원길
세종대의 명재상 맹사성孟思誠(1360~1438)은 온양이 고향이다. 고향집인 배방면의 ‘맹씨행단’은 본래 고려 말의 충신 최영(1316~1388)의 집이었다. 그러던 것을 최영이 맹사성을 손녀사위로 삼으면서 물려주었다. 맹사성은 이름 난 효자였다. 조선 건국 후 관직에 나간 뒤에도 온양 배방면으로 낙향한 아버지 맹희도를 자주 찾아 문안하였다.
“맹사성은 온양을 오갈 때 삼남대로와 충청수영로를 이용하였다. 한양에서 삼남대로를 따라 소사1동 소사원에 도착한 뒤 길을 바꿔 충청수영로를 따라 평택현(팽성읍)을 거쳐 온양에 이르렀다. 왕의 총애를 받는 재상이 대로大路를 오르내리자 주변 고을 수령들은 아첨하기 위해 몸이 달았다. 어느 봄날 맹사성이 맹씨행단에서 한양으로 올라간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자 진위고을과 양성고을 수령들은 의관을 갖춰 입고 관인을 든 채로 장호원 앞에서 맞을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기다리는 맹사성은 오지 않고 행색이 허름한 노인이 소등에 올라탄 채 먼지를 피우며 지나갔다. 화가 난 수령들은 쫓아가 ‘맹정승이 지나갈 길에 네깟 놈이 먼지를 피우며 지나가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소에 탄 노인이 심드렁하게 대답을 했다. ‘내가 맹고불(사성)이다’ 수령들은 그 말에 깜짝 놀라 도망치다 손에 들었던 관인을 연못에 빠뜨렸다” 진위면 신리 장호원에 전해오는 ‘인침담印沈潭 전설傳說’이다.
인침담 전설은 백현원의 ‘공당문답公堂問答’ 못지않게 유명했다. 선비들은 장호원에서 인침담 전설을 떠올리며 맹사성의 청렴함과, 아첨을 일삼던 고을수령들의 행태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의 ‘성호집’에 실린 ‘관인을 떨어뜨린 노래墜印行’도 그 가운데 하나다.
(前略)당황하고 놀라서 관인을 간수 못해
/蒼黃不見左顧龜·창황불견좌고구
벌벌 떨다 연못에 떨어뜨려 버렸네
/戰兢臨淵求不得·전긍림연구불득 (중략)
사람은 간 지 오래이나 연못은 남아 있어
/其人已遠其水在·기인이원기수재
그 이름 영원토록 공의 청렴을 드러내네
/此名終古表淸約·차명종고표청약
어찌 끝이 있으랴 세상에 아첨하는 이들이
/何限世上夸毗子·하한세상과비자
교만 떨고 뽐내며 시위소찬만 하는 것이야
/驕淫矜伐徒素食·교음긍벌도소식(後略)

장호원은 조선 초기에 설치된 역원驛院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삼남대로는 진위면 갈곶리 이방원과 신리 장호원·송북동 백현원을 거쳐 대백치(흰치고개)를 넘었다. 성호 이익의 시詩에 따르면 이 같은 교통로는 18세기 중반까지도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장호들과 건넌들이 개간되면서 장호원이 폐원廢院되고 진위면 봉남리에서 진위목교를 건너 마산리 신제점을 지나가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 근대 이후 교통망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국도 1호선 진위교
▲ 밖술막이 있었던 진위면 견산4리 산직촌

 

■ 우리 시할머니가 주모였어
‘밖술막’은 진위천 건너 장호원으로 넘어가기 전 여행자들의 쉼터였다. 밀물이 차오르면 징검다리로 진위천을 건너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럴 때면 여행자들은 밖술막에 앉아 출출한 배를 달래며 썰물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장호들이 간척되고 길이 바뀌면서 장호원이 폐원廢院되자 봉남리에서 목교를 건너 소백치를 넘는 새 길이 열렸다. 새 길은 밖술막에서 우회하여 봉남리로 들어갔다. 진위 읍치邑治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밖술막은 더욱 번창했고 19세기 읍지邑誌에도 등재되었다. 간이주막으로서는 영광스런 일이다.
밖술막은 진위면 견산리 산직촌 마을에 있었다. 삼남대로는 지금은 한승아파트가 들어 선 성황고개를 넘어 산직촌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났다. 산직촌은 예로부터 윗우물·아래우물을 비롯하여 우물이 세 개나 있었다. 가뭄이 잦고 물이 부족한 평택지역에서 좋은 우물은 주막이 입지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밖술막은 산직촌 마을회관 옆에 있었다. 지난 봄 마을회관에서 만난 김간난(가명·92세)씨는 ‘우리 시할머니가 주모였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주막을 운영했냐고 물었더니 자신도 그랬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주막은 문을 닫았지만 동네사람들은 오랫동안 ‘주막집’으로 불렀다. 주막집은 규모는 작았지만 길과 붙어 있는 너른 마당이 있었다. 어쩌면 옛날 평상을 놓고 술을 팔았을 너른 마당은 정월이면 동네사람들의 윷놀이 판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는 후퇴하는 국군과 밀고 내려오던 인민군들도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내려갔다.
지난 10월 중순 필자가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옛 주막집터에는 새집이 건축되고 있었다. 빈집 담장 옆으로 자란 감나무에는 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삼백년도 더 되었다는 엄나무는 가을맞이 준비에 한창 바빴다. 세월의 두께가 걷히고 지난 세월만큼이나 더 두꺼운 삶의 두께가 쌓일 새집에 발복發福을 기원하며 마을을 나왔다. 

 

▲ 밖술막이 있었던 진위면 견산4리 산직촌 민가
▲ 백 수십 년이 넘었다는 주막 옆 엄나무

 

 

■ 갈곶리 이방원에서 길은 두 갈래로
밖술막에서 성황당을 넘어서면 가곡리 입구에 개실주막이 있었고, 이곳에서 진위일반산업단지(LG전자) 방향으로 내처 걸으면 백두고개가 나왔다. 백두고개를 넘어서면 진위면 갈곶리.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하천이 마을 앞을 흐르고 갈곶초등학교 위쪽에는 ‘이방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었다. 길은 이방원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길은 역로驛路를 따라 청호리·고현리를 지나 오산시 대원동 청호역으로 향했고, 다른 한 길은 오산시 원동의 오산신점과 연결되었다.
사실 필자는 아직까지 이방원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조선 중기에 폐원廢院된데다, 갈곶리(동)·청호리 일대가 재개발로 교란되어 지명으로 파악하기에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전 지금은 오산시에 편입된 고현동을 조사하며 한 가지 단서를 발견했다. 고현동 주민들에게서 고현초등학교 건너편에 고분다리(굽은 다리의 사투리)가 있었는데, 해방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규모가 큰 고분다리주막과 작은 주막 두 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윤상(79세·고현동)씨는 일제 말 고분다리주막에는 기생들이 여러 명 있어서 근동의 한량들도 무시로 드나들었고 진위경찰지서의 일본인 순사들도 칼을 차고 와서 술을 마셨는데, 주막집 기생들의 수완이 어찌나 좋았던지 한량이고 경찰이고 간에 한 번 술자리에 앉으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털리고 난 뒤에야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고분다리 주막이 옛 이방원 터였을 것으로 비정한다. 본래 주막이란 교통 상 꼭 필요한 곳에 설치되기 마련이고, 조선후기 간척이나 교량건설 등으로 도로교통망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을 지라도 대체로 주막만큼은 건재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고분다리 근처를 서성이다 옛날에 청룡과 황룡이 두꺼비와 싸웠다는 ‘두재비골’을 지난다. 두재비골 근처에는 선바위가 있었다. 선바위는 우뚝 선 모양이 볏단을 닮아 옛날 어떤 사기꾼이 소금 1배(전마선 1척 분량)와 바꿔 먹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러고 보니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동탄신도시 부근까지 바닷물이 들어갔다. 갈곶리와 고현동 일대에 ‘뱃터’라는 지명이 있는 것도 그 때의 흔적이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역사를 보려는 습성이 있다. 과거 자연환경을 읽고 그 속에서 살았던 선조들의 삶을 이해한다면 역사적 사실 뿐 아니라 역사가 주는 교훈과 감동을 함께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삼남대로가 지났던 견산리 산직촌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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