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1월 26일

진위청년회 설립 후 2년 동안 부진
회장 신찬우 부흥책 논의, 총회개최

 
“振威靑年會는 設立된 지 旣히 二個年餘이나 會運이 萎縮不振하든 바, 今般 當地 靑年諸氏와 會長 申贊雨氏는 復興을 策코자 來二十六日 (日曜)에 總會를 開하고 復興策을 協議한다는데, 會員은 一齊히 參席하기를 期待하며 集會場所는 平澤長老敎會堂이라더라”(동아일보 1922년 11월 22일)

우리나라에서 청년회가 처음으로 조직된 것은 1903년 10월 28일이다. 그 이전에는 독립협회라는 사회단체가 결성되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기독교에 최후의 기대를 건 애국청년들과 언더우드·아펜젤러 등의 초창기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과 청원으로 1901년 북아메리카 기독교청년회(YMCA)의 국제위원회는 질렛을 창설 전문 간사로 파견했다. 이를 계기로 1903년 10월 28일 창립총회를 갖고 황성기독교청년회를 발족하게 됐는데 우리나라 청년단체의 효시이다. 그렇지만 청년회가 우후죽순처럼 조직 또는 설립된 것은 1919년 3·1운동 이후였다. 일제는 1910년 8월 강점 이후 강압적 무단통치를 했지만 3·1운동으로 식민지 한국인의 의식과 활동을 파악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통치를 시행했다. 이에 언론·결사 등의 제한적 허용이 되었는데 당시 청년들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청년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평택에도 진위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진위청년회의 모태는 진위구락부(振威俱樂部, 구락부는 ‘클럽’의 일본식 표현)로 3·1운동 직후에 조직되었다. 그렇지만 진위구락부는 이름만 있었지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한 유명무실의 청년조직이었다. 이렇게 2년 정도 지내다가 당시 회장인 신찬우와 구창근 등이 중심이 되어 구락부를 부활시키기로 하고 명칭도 진위청년회로 바꿨다. 이렇게 해서 진위청년회가 탄생했다. 진위청년회는 처음에는 평택장로교당에서 총회를 개최하기로 했으나 동아일보 평택분국으로 장소를 옮겨 개최했다. 이날 총회에서는 회장에 신찬우, 부회장에 최영수, 학예부장에 박노수, 체육부장에 신정훈, 사교부장에 성주한, 풍화부장에 김형철, 평의원에 윤용섭·김신경·김영주·이돈직·장세만·박봉진·이의계·원춘식 등을 각각 선임했다. 회장 신찬우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청북면장으로 활동한 바 있는 것으로 보아 청북면의 유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평택에는 ‘진위구락부’가 두 번 조직된 바 있는데 하나는 앞서 살펴본 진위청년회의 모태이고 다른 하나는 1927년 6월 12일 이대헌 등 현덕면의 유지들이 조직한 사회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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