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희국악관’ 건립을 제안하며

 

 

 


 
뿌리가 썩으면 나무도 죽습니다. 역사마다 뿌리역할을 담당하는 주체는 시대마다 다양합니다. 어느 시대에는 선비가, 또 나라가 국난(國難)에 처하면 장군이 그리고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고 보살피는 성군(聖君)이 나타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미래를 걸머지고 나아갈 어린이가 나라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은 36년 동안 우리는 5000년을 이어 내려온 모든 우리의 전통문화가 말살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왜놈들은 식민사관으로 왜 일본이 조선을 다스리고 보호해야 하는 지를 가르치기 위해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했습니다.
1950~60년대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여자가 국악을 공부한다고 하면 마치 술집여자나 기생이라도 되는 줄 알던 시절이었습니다. 국악을 공부하는 사람을 천하게 여기고 손가락질 하며 수군거리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기생들이 교육을 받던 ‘권번’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그 시기에도 잔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악은 ‘상놈이나 하는 짓’이란 편견을 무릅쓰고 오직 사라져가는 우리 국악의 전통과 맥을 이어 후대에 까지 민족정기를 길이길이 이어가야 한다는 일념아래 지영희 선생은 서울 창덕궁 앞 관훈동에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세워 후학들을 길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판소리나 국악기 연주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보고 배울 수 있는 통일된 자료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국악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가르치는 선생님이 입으로 전해주는 구전(口傳)을 그대로 이어받아 하나하나 외우면서 배워야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도 배운 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이 빠지는 경우도 있고 또 세월이 지나면서 왜곡되거나 변형되는 경우가 허다해 원래 내용을  알아볼 수 없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국악기 연주도 마찬가지였지요. 악보가 있으면 악보에 있는 대로 연주를 하면 될 것인데 악보가 없으니 가르치는 사람마다 조금씩 음이 다르기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영희 선생은 이런 방법으로는 국악이 더 이상 발전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오로지 선생의 가르침만으로 전해 내려오던 국악을 모두 현대적인 악보로 만들어서 어느 때 어느 누가 연주를 해도 모두 한가락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국악’이라고 하는 우리 음악을 가질 수 있도록 조선 세종 임금 때 위대한 업적을 남긴 박연 선생에 필적할만한 한국 국악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분이 바로 지영희 선생입니다.
1950~60년대 해방은 됐지만 왜놈들에게 유린당한 우리 정신문화와 사회체계가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던 시절 가족들 생계도 팽개친 채 우리 전통문화를 지켜오던 예능인들은 하나같이 살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허덕이기도 숨 가쁜데 언제 문화생활을 할 여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국악인으로 한동안 많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았던 박동진 명창이 노래를 부를 곳도 없고 불러주는 사람도 없어 장소팔·고춘자 쏘단을 따라 전국을 돌며 삼류극장을 전전했으니 그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마찬가지 시(詩)를 쓰는 사람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배고픔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매일매일 ‘싸전’에 가서 봉지쌀을 사다 먹어야 했고 자식들은 학교에 갈 돈이 없어 초등학교만 나오고는 공장에 취직을 하든지 아니면 어느 사무실에 가서 급사 일을 하며 나날을 보냈습니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서도 TV 방송을 시작하며 생겨난 국악프로그램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인기프로그램이었습니다.
서서히 국악이 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할 무렵 ‘돈’이 생기고 ‘자리가 만들어지자 자연스럽게 ‘염불 보다는 잿밥’에 눈이 어두운 무리들이 행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니전투구 (泥田鬪狗)’ 뻘밭에서 싸우는 개같이 이권을 놓고 서로 물고 뜯으면서 논공행상을 벌이며 싸움질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보아 넘기지 못하는 동물성은 국악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09년 포승면 내기리에서 집안 대대로 무속인 이었던 지용득 선생의 아들로 태어난 지영희 선생은 지용구에게서 배운 해금산조와 양경원에게서 배운 피리 시나위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52호로 지정 받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국악인들은 지영희 선생이 박수와 무당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홀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어렵사리 국악의 여러 가지 분야를 다 섭렵해서 국악의 전통을 이어온 공로는 물론 8·15해방 이후에 쌓아올린 금자탑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더 더군다나 그가 태어난 고향인 평택에서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지영희가 누군지?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 뭘 하던 사람인지? 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영웅은 고향에서는 천대를 받는다지만 이렇게 무지한 세상에서 지영희 선생이 오로지 외길로 갈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국악 사랑과 또 끊임없는 가족들의 위로와 격려였을 것입니다.
올해 10월 31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평택호에 있는 평택호예술관에서 평택시와 경기관광공사에서 마련한 ‘지영희 선생 특별전’이 열립니다.

 

그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국악'이라고 하는 우리 음악을
가질 수 있도록
조선 세종 임금 때
위대한 업적을 남긴
박연 선생에 필적할만한
한국 국악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분이
바로 지영희 선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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