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부지런하지만 “가족과 교감 아쉬워”

대학까지 보낸 부모님 기대 등지고 한국행 택해
필리핀 국제결혼 1세대, 드라마 보고 한국어 배워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고 무리를 해서라도 더 많이 가르치려는 부모의 마음은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필리핀 출신 다문화 가족으로 16년째 한국생활을 하고 있는 로웨나 라콘사이(Rowena Laconsay·40) 씨의 부모 역시 자녀들을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세 자매 중 큰딸이었던 로웨나는 특히 머리가 좋아 부모님에게는 큰 희망이었다.
산골에 사는 가난한 농부였던 그녀의 아버지, 하지만 로웨나를 위해 비교적 환경이 좋은 먼 도시로 유학을 보내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했다. 고생하며 농사지어 번 돈으로 대학에도 보내줬지만 어린 두 여동생은 어려운 형편 때문에 같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두 동생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도우며 가까운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온 가족이 큰 딸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로웨나는 대학에서 행정학과 금융재정학을 전공했다. 그녀의 꿈은 졸업한 후에 은행원으로 취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도 은행은 화이트 컬러로서 남녀 누구에게나 최고의 직장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로웨나는 은행 대신 졸업한 후 조그마한 회사에 취직해 조금씩 받는 월급으로 동생들의 학업을 도우며 살아가야만 했다. 부모님도 그 동안 힘들게 공부시켰던 큰딸이 이제 집안을 도와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취직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995년, 로웨나는 한국 남자와 국제결혼을 선택 필리핀을 떠나게 된다. 그녀의 부모님은 기가 막혔지만 딸의 앞날을 막을 수는 없는 일, 아버지는 무척 서운해 하시면서 딸을 멀리 이국땅 한국으로 시집을 보내야했다.
결국 큰딸의 도움으로 대학에 입학했던 둘째 딸은 공부를 계속 할 수 없어 가까스로 1학년만 마치고 중퇴해야만 했다. 언니가 필리핀을 떠난 후에 가세도 기울어 학비를 조달할 길이 막막했기기 때문이었다.
“제가 벌어서 동생들을 공부시켜야 하는데 갑자기 결혼하면서 부모님께 너무너무 죄송했어요. 한국에 시집온 후에도 친정집에 가기가 두려웠죠” 조국에 자주 갈 수 없었던 것은 이역만리 거리 탓도 있지만 마음 한편에 늘 부모님에 대해 죄스러움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그녀의 가슴앓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가는 것은 당연한 순리. 외로웠던 그녀에게 시집 식구들의 사랑은 더할 나위 없는 따스함으로 다가왔고 그 사랑을 듬뿍 받으며 그녀는 점차 진짜 한국인이 되어갔다.
평택시 서정동은 그녀가 시집와서 지금까지 계속 살아오고 있는 곳이다. 그녀가 처음 시집을 왔을 때만 해도 한국에는 필리핀에서 시집온 국제결혼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다행히 로웨나 씨와 함께 합동결혼식을 치르고 한국에온 동포가 인근 도일동에 살게 되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고. 우연찮게도 같은 지역에서 살기 시작한 두 여인은 자주 만나 향수를 달래며 희로애락을 같이 할 수 있었다.
“그 언니에게 자주 놀러갔어요. 언니네 집은 넓은 텃밭도 있고 나무며 숲도 볼 수 있어서 절로 고향 생각이 나곤 했죠. 제가 사는 서정동은 도심이라 답답하잖아요. 그래서 언니네 집에 가면 하루 종일 놀다가 오후 늦게 돌아오곤 했어요. 그래도 시집 어른들께서 이해를 해 주셨죠.” 그러나 얼마 전 그 언니네가 이충동의 아파트단지로 이사를 해 이젠 고향 정취를 느낄만한 곳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고.
“신랑은 장남인데 한국에서는 장남이 부모님을 모시고 같이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지만 막상 시집에 오니 손아래 시누이 둘, 시동생 하나 이렇게 모두 일곱 식구가 같이 살게 됐죠”
그녀에게는 전혀 생소한 결혼문화였다.
“필리핀에서 결혼하면 자녀와 부모는 완전히 독립해서 살아요. 저는 처음에 너무 힘들어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죠. 하지만 시댁 식구들이 저에게 너무 잘 해 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 가족이 될 수 있었어요. 어머니께서는 저를 친딸처럼 여기시고 잘 대해 주셨어요. 심지어 시누이가 질투할 정도였죠.”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 늦게 들어오는 남편, 덕분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결국 두 고부간의 정은 날로 두터워져만 갔고 비록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요즘도 시어머니는 동네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로웨나 씨를 데리고 나가 며느리를 소개하며 자랑한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지역에 한글을 무료로 가르쳐주는 다문화센터 같은 것이 없었잖아요. 수원이나 서울까지 나가서 대학에 개설된 한글강좌를 들어야 하는데 비용도 제법 들고 거리도 멀어 아무나 다닐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TV 드라마를 즐겨보면서 한글을 익혔지요”
드라마를 통해 한국의 가족관계나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그녀는 아직까지도 당시 보던 드라마 제목들을 줄줄 외울 정도로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이런 노력의 결과, 첫 아이를 낳은 후에는 한국말을 가르치며 기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그녀는 그 사이 시누이와 시동생을 모두 출가시키고 딸 둘을 더 둬 칠순 시부모와 함께 일곱 식구의 살림을 책임지는 당당한 가정주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로웨나 씨가 꼽은 한국의 가장 좋은 점은 젊은이들이 어른을 공경하는 경로효친 사상이다. 이와 함께 근면 성실한 한국인들의 모습도 조국 필리핀이 본받을 만하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가족끼리 얼굴도 보기 힘들 정도로 너무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조금 가정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부부가 맞벌이하면서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 늦게 들어오니 아이들과 대화할 시간도 없어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에게 좋은 옷이나 장난감을 많이 사주지 못해도 시간을 내어 같이 영화도 보러가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녀도 요즘 집 가까운 곳에 있는 보일러 부품회사에 다니며 맞벌이를 한다. 아직 초등학생인 세 아이가 공부에 얽매이기 보다는 자유롭게 뛰어놀길 바라 학습지로 주요 과목을 보충하면서 학교에서 실시하는 방과 후 교실에 보내는 정도였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 앞으로 점점 늘어날 교육비를 생각하면 마냥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 그녀를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부모님들의 희생이 한국 땅에서도 내리사랑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문화가족이란?
우리사회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민자, 북한이탈주민(새터민), 외국인거주자 및 그들의 자녀들을 비차별적으로 부르는 용어이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