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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2. 길과 주막 그리고 사람들>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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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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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임금이 남행 중
너더리주막에서 쉬어갈 때
조서방이 임금과 신하·궁인들을 푸짐하게 먹여
감복한 임금은 그에게 선달先達 벼슬을 내렸다

 

 

태안이나 서산·당진 사람들은
한선을 타고 포승읍 만호리
대진에서 내려 안중읍과
청북면 현곡리를 거쳐
한산3리 판교(너더리)를 지났다.
아산과 신창에서 현덕면의
계두진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황산리와 안중을 거쳐
수원으로 올라갔다.
팽성읍이나 아산 백석포에서
현덕면 신왕리 신흥포로
들어온 사람들은 금곡4리 숲말과
토진리 공수다리, 고좌마을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갔다.
 

  

 

 

   
▲ 해방 후에는 주막 서너 개가 번창했다는 청북면 어소교 주변

- 과객科客들의 쉼터 돌모루와 너더리 주막

주막은 ‘길의 정거장’이었다. 삼남대로처럼 큰길가의 주막은 왕도 쉬었다가고 고관대작과 부상대고들도 머물다 갔다. 지역과 지역,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던 작은 길목에는 민중들의 주막이 있었다. 민중들은 주막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허기진 배를 채웠으며 세상소식을 접했다. 때론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의장소가 될 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옛 주막에는 사람냄새, 다양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잊혀져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 우리의 자화상이며 그리움이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8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그리고 주막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 놓으려 한다. 독자들의 애정과 관심을 기대한다.
 - 편집자 주 -

 

 

 

 

   
▲ 청북면 어소리 돌모루주막
   
▲ 해방 전후 새우젓배가 닿았다는 관리천과 어소교

■ 한양 가는 길의 정거장 돌모루주막
충청도 내포지역과 서평택에서 한양 가는 옛길은 여러 갈래였다. 태안이나 서산·당진 사람들은 한선을 타고 포승읍 만호리 대진에서 내려 안중읍과 청북면 현곡리를 거쳐 한산3리 판교(너더리)를 지났다. 아산과 신창에서 현덕면의 계두진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황산리와 안중을 거쳐 수원으로 올라갔다. 팽성읍이나 아산 백석포에서 현덕면 신왕리 신흥포로 들어온 사람들은 금곡4리 숲말과 토진리 공수다리, 고좌마을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갔다. 여러 갈래로 올라가던 길들은 청북면 한산1리 돌모루주막과 한산3리 너더리주막에서 만났다.
돌모루주막은 한산리와 토진리의 갈림길에 있다. 청북면 토진리 고좌마을과 어소리 설창, 한산리 원한산마을을 지나는 길은 돌모루주막 앞 관리천과 돌모루다리에서 갈라진다. 근대 전후만 해도 관리천으로는 배가 드나들었고, 고좌마을에서 징검다리를 건너 한양으로 가는 과객科客과 여행자들이 무시로 지났다. 주막은 돌모루다리 옆에 하나, 건너편 고좌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 개가 있었다. 주막들은 자동차보다 보행자가 많았던 시절에 성업했지만 근대교통의 발달로 걸어 다니는 사람이 줄고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대부분 문을 닫았다.
필자가 돌모루주막을 처음 찾은 것은 2005년이다. 한산1리 마을조사 중에 이장 백O 씨가 젊은 시절 돌모루주막에서 힘깨나 썼다는 말을 듣고서였다. 한겨울에 찾았던 돌모루주막은 초가삼간 오두막을 걷어내고 지붕에 슬레이트만 덧씌운 초라한 모습이었다. 두 세 평 남짓한 실내 한쪽에는 잡화며 과자가 쌓여 있었고 연탄난로가 놓여 있는 중앙에는 목로주점에나 있을 법한 긴 나무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70세는 족히 넘었을 주모는 막걸리 주전자와 안주로 내놓을 두부김치보시기를 들고 바삐 통로를 오갔다. 오가는 틈틈이 손님들이 던지는 농담과 대화를 거드는 것도 주모의 할 일이었다.

 

 

 

 

 

 

   
 
   
 

■ 보따리장사하고 주막해서 애들 27명 키워
돌모루주막은 30여 년 전부터 허준O(82세) 씨가 주모酒母(술어미)다. 허 씨가 운영하기 전에는 고 씨, 김 씨가 운영했다고 한다. 허 씨가 인수할 때만해도 술과 해장국을 팔았지만 20여 년 전부터 구멍가게와 주막을 겸하고 있다. 올해 8월 중순 돌모루주막을 다시 찾았다. 주막은 10여 년 전과 변함없었지만 주변 환경은 많이 변해있었다. 주모와 함께 살던 장애인 딸은 하늘나라로 떠났고 굳건하기만 했던 돌모루다리도 난간이 파손된 상태였다. 주모는 젊은 사람들은 대형마트로 달려가지만 버스종점인데다 오가는 택시기사와 트럭기사들이 많이 찾아서 그럭저럭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주막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필자를 보고 주인은 대뜸 ‘아들, 어디서 왔어?’라고 묻는다. 낮선 반응에 멈칫하며 방문 목적을 말씀드렸더니 플라스틱 의자를 내 놓으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허 씨의 고향은 쌍계사가 있는 지리산 내원사골. 부친은 약초꾼이었다. 약초재배를 하며 별 어려움 없이 살던 허 씨는 16살에 순천의 어느 가난뱅이 총각에게 시집을 갔다. 남편은 남의집살이를 하는 가난뱅이였다. 끼니 굶기를 밥 먹듯이 하다 고공살이를 하러 올라오는 남편을 따라 평택에 정착했다. 하지만 남편은 가족부양의 책임감이라든가 생활력이 없는 위인이었다. 평생 돈 벌어오는 것이라곤 없었고 세경을 받으면 빌려주거나 술 마시기 일쑤였다. 생활력 없는 허깨비였지만 남편은 무려 딸 여섯에 아들 셋이나 낳게 했다. 허 씨는 열 한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젊은 새댁일 때부터 보따리장사를 했다. 서울 사당동을 비롯하여 인천·부천·수원·평택장·안중장 등 안 다녀본 곳, 안 팔아 본 물건이 없다.
그렇게 보따리장사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중 서른 세 살 나던 해 남편이 세상을 떴다.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지만 남편이 떠난 자리는 쉽게 메우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자녀들 중에는 정신지체를 가진 아이도 있어 여자 혼자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37세에 재혼을 한 것도 장애인 딸을 거두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재혼마저 실패했고, 장사하러 다니던 중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까지 거두면서 아이들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나중에는 이혼한 뒤 혼자 아이들을 키우다 죽은 친정 오빠의 자녀들까지 거두었다. 그렇게 거둔 아이들이 무려 27명. 스물일곱 명의 아이들과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허 씨는 큰 불만은 없다. 아이들을 명문대는 보내지 못했어도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기술을 배우게 해서 먹고 살 기반은 마련해줬다. 30여 년 전 주막집에 정착한 것은 정신지체가 있는 딸을 위해서였다. 장성한 자녀들이 모두 그의 곁을 떠났을 때도 함께 살았던 딸, 그 딸마저 세상을 등지고 나니 허전한 마음이다. 허 씨는 늙었지만 아직도 사람 거두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선뜻 밥을 나눠준다. 낮선 필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도 숙명과도 같은 자비심 때문이었음을 주막집을 나오며 깨달았다. 

 

 

 

■ 임금님을 접대하여 선달벼슬 얻은 조서방
한산3리 너더리(판교)는 돌모루길과 청북면 현곡리에서 건의, 구설창을 지나온 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서평택에서 한양으로 가는 모든 길은 이곳에서 만나 수원방향으로 올라갔다. 너더리는 길목이 크다보니 행인들의 발길이 잦았고 장시場市와 주막도 컸다. 너더리주막의 주인은 조 씨였다. 그래서 통상 ‘조서방네주막’이라고 불렀다. 조서방네주막은 한 때 ‘조 선달先達댁’으로 높여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사연은 이러하다. “조선 후기 남행하던 임금이 너더리주막에서 쉬어가게 되었다. 큰 경사를 맞게 된 조서방은 동분서주하며 소 10마리를 잡아서 임금과 신하·궁인들을 푸짐하게 먹였다. 이에 감복한 임금은 조서방의 노고에 감사하여 선달先達 벼슬을 내렸다” 임금의 은혜를 입은 뒤 너더리 조서방네는 ‘텔레비전’에 보도된 유명 식당처럼 근동에서 유명한 주막이 되었다. 선달벼슬은 얻은 조서방에 대한 대우도 깍듯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
현재 너더리주막집의 주인은 조영O 씨 부부다. 조영O(64세) 씨는 너더리 조서방의 증손녀다. 조 씨는 주막집에서 태어나 포승읍 내기리로 시집을 갔다. 그의 어린 시절 너더리장은 폐장廢場 상태였다. 당시 너더리주막은 국밥은 팔지 않았고 돌모루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잡화와 술만 팔았다. 또 가게 한쪽에서는 한복을 염색하는 염색약도 팔았다. 염색약장사는 매우 잘 되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외할머니는 하루 종일 벌어들인 돈을 항아리에 담아 벽장 구석에 쌓아 두곤 하였다.
조영O 씨에 따르면 주막집은 증조부 때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조부께서 물려받았다가 나중에는 외할머니가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주막의 규모는 사립문이 있는 방 두 칸에 부엌이 달려있는 초가삼간 규모였다. 그러다가 새마을운동을 하며 슬레이트를 올렸고, 20여 년 전 안중에 살던 조 씨 부부가 돌아와 2층 양옥으로 다시 지었다. 해방 이후 기능은 크게 바뀌었지만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주막은 동네 사람들의 마실방 구실을 하였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조서방네서 다리쉼을 하며 간단히 술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상례였다.
조 씨 부부는 너더리주막의 마지막 지킴이다. 이제는 교통망이 변하여 간간이 율포리로 나가는 버스만 지나가고 장터에는 모기들만이 득실거리지만 그에게 이곳은 고향이고 추억이다. 집터의 기氣가 쎄서 시아버지가 살 때에는 도깨비도 자주 나타났으며, 그가 들어올 때는 귀신하고 기氣싸움도 했다지만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었다. 세월은 그렇게 세상과 삶을 변화시켰고 그의 삶도 변하게 하였다.


 

 

 

 

   
▲ 너더리 조서방네 주막을 지키는 한만윤 씨 부부
   
▲ 여러 갈래 길이 만나는 청북면 한산3리 너더리(판교)

 

 

   
▲ 너더리 조서방네 주막을 지키는 한만윤 씨 부부
   
▲ 너더리 조서방네주막을 지키고 사는 조씨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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