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1월 26일

평양사범학교 적화사건 이종필 등 3명
평택노농협희 조직으로 세력 확장해

 

 

 

 “경기도 평택경찰서에서는 지난 二十六일에 진위군 송탄면 지산리 리종필(振威郡 松炭面 芝山里 李鍾弼)을 검거하는 동시에 다수의 서적을 압수하고 六시 五十분차로 평택경찰서로 압송하였다는데 이어서 二十七일 오전 두시경에 평택 시내에서 돌연 청년 二명을 검거하는 동시에 가택 수색을 하여 다수 서적과 편지 등을 압수하고 엄중 취조 중이라 한다. 사건의 내용은 절대 비밀리에 붙임으로 알 수 없다고 한다. 검거된 이는 다음과 같다. 平澤面 平澤里 李喜秀, 平澤面 平澤里 全昌基, 松炭面 芝山里 李鍾弼.”(『동아일보』 1932년 11월 30일)

1930년대 세계적인 공항이 시작되면서 식민지조선의 경제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었다. 더욱이 서민들의 삶이 팍팍함에 따라 사회적으로도 어려움이 뒤따랐다. 많은 청년들과 학생들은 사회주의에 공감했다. 이들은 독서회를 통해 사회주의 이념 서적을 함께 읽으면서 농민 또는 노동자를 위해 투쟁하기도 했는데 이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 저항하는 의미도 담겨있었다. 때문에 일제는 사회주의 이념이 널리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1932년 11월 26일 이른 아침 평택경찰서에서 형사들이 갑자기 송탄면 지산리(현 지산동)으로 출동했는데 바로 독서회를 통해 사회주의이념을 공부하는 청년을 체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지산리에는 ‘이종필’이라는 청년이 사회주의에 공감하고 관련 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이른바 동지들을 확보해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일단 평택경찰서로 옮겨진 후 이어 다음날 27일 새벽 2시에는 사회주의에 공감하고 함께 활동하던 이희수와 전창기도 평택리에서 체포됐다.
당시 언론은 왜 이종필 등이 검거됐는지 제대로 보도 하지 못했는데 이는 평택경찰서가 철저하게 그 배경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족운동가나 사회주의자를 잡아들일 때는 항상 이러한 수법을 적용했다. 평택경찰서 형사들은 이들의 집을 수색해 당시 불온서적이라고 했던 사회주의 서적과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편지까지 압수해 갔다.
이종필·이희수·전창기 등이 검거된 배경은 ‘평양사범학교 적화운동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이들은 평택경찰서에 체포되기 직전인 1932년 9월 평택노농협의회(平澤勞農協議會)를 조직한 바 있었다. 이 사건은 좀 더 확대돼 평택적색농민조합의 핵심인물인 남상환(南相煥)까지 검거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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