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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2. 길과 주막 그리고 사람들>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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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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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교리 중앙동 주막거리는 100여 년 전까지 만해도
숯고개·계루지·동청포·해창포·다라고비진으로
나가는 길이 교차하는 요지였다

 

 

1911년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에
고두면(고덕면지역)에는
‘좌교점’ ‘율포점’ ‘해창점’
‘강서점’ ‘건곤점’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좌교점은 고덕면 좌교리
중앙동의 ‘안진다리주막’,
율포점은 율포2리 ‘밤개울 주점’,
해창점은 해창3리 ‘해창주막’,
건곤점은 궁2리
‘삼나무구비주막’이다.
여행자들의 카페와도 같았던 주막은
만남과 쉼 그리고 소통의 장소였다.
 

  

 

 

 
   
▲ 사진 중앙 고덕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좌교리 중앙동 주막거리

- 진위에서 해창포로 가던 길목 안진다리주막

주막은 ‘길의 정거장’이었다. 삼남대로처럼 큰길가의 주막은 왕도 쉬었다가고 고관대작과 부상대고들도 머물다 갔다. 지역과 지역,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던 작은 길목에는 민중들의 주막이 있었다. 민중들은 주막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허기진 배를 채웠으며 세상소식을 접했다. 때론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의장소가 될 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옛 주막에는 사람냄새, 다양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잊혀져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 우리의 자화상이며 그리움이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8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그리고 주막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 놓으려 한다. 독자들의 애정과 관심을 기대한다.
 - 편집자 주 -

 
   
▲ 고덕면사무소와 안진다리 주막이 있었던 좌교리 중앙동마을

■ <조선지지자료>에서 안진다리주막을 찾다
1911년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에 고두면(고덕면지역)에는 ‘좌교점’ ‘율포점’ ‘해창점’ ‘강서점’ ‘건곤점’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좌교점은 고덕면 좌교리 중앙동의 ‘안진다리주막’, 율포점은 율포2리 ‘밤개울 주점’, 해창점은 해창3리 ‘해창주막’, 건곤점은 궁2리 ‘삼나무구비주막’이다. 여행자들의 카페와도 같았던 주막은 만남과 쉼 그리고 소통의 장소였다. ‘밤개울주점’은 고덕면 궁1리 다라고비진에서 좌교1리(앉은다리)를 거쳐 아홉거리와 서정리역으로 빠지는 길목의 쉼터였고, ‘해창점’은 진위현의 해창海倉이어서 선상船商들과 세곡 운송꾼들로 번잡했던 해창3리의 정거장이었다. 건곤(乾坤·궁2리)마을은 옛부터 궁방전이 많아서 ‘건궁이’, ‘건군이’라고도 불렀다. 물길이 안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건군이 앞은 진위천이 마을 앞을 휘돌아 흘렀고 곳곳에 간석지가 널려 있었다. ‘삼나무구비주막’은 다라고비진에서 병남면(평택역 일대) 방면으로 가는 마을 옆 삼나무 모퉁이에 있었다.
   
▲ 한 때 주막과 선술집으로 흥청거렸던 고덕면사무소 앞
고덕면 일대에서는 ‘안진다리주막’이 가장 컸다. 고덕면에서는 좌교1리 앞 좌교천(서정천)의 돌다리를 ‘앉은다리(좌교)’라고 불렀는데, <조선지지자료>의 저자는 이것을 소리나는 대로 ‘안진다리’라고 표기하였다. ‘안진다리주막’은 고덕면사무소 앞에 있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면사무소가 자리를 잡으면서 ‘중앙동’ 또는 ‘면실’로 불렸고, 주막이 있어 ‘주막거리’로도 불렀다. 좌교리 중앙동의 주막거리는 100여 년 전까지 만해도 송탄 숯고개로 나가는 길, 두릉리 계루지로 넘어가는 길, 동청포를 거쳐 청북면으로 건너가는 길, 해창포로 나가는 길, 궁리 다라고비진으로 나가는 길이 교차하는 요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고덕초등학교까지 자리를 잡으면서 고덕 교육의 중심역할도 하였다. 19세기 고산자 김정호의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에는 삼남대로가 진위현의 읍치邑治였던 봉남리에서 진위목교를 건넌 뒤 새둑거리를 지나 소백치를 넘도록 되어 있는 반면, 봉남목교를 건너자마자 우측으로도 큰 길 하나가 더 갈라졌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 길은 숯고개 ‘지현주막’과 고덕면 경계의 ‘아홉거리’, ‘안진다리주막’을 거쳐 해창포로 연결되었던 ‘세곡운송로’였다. ‘안진다리주막’은 숯고개의 ‘지현주막’과 함께 세곡稅穀 운송과 물자 유통을 돕던 ‘해창길’의 가장 중요한 주막이라고 할 수 있다.

 

   
▲ 길손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을 좌교리 입구 주막집

■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공존하는 마분馬墳마을
   
▲ 두릉리 계루지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었던 서울옥 주막집 터
해창2리 마분馬墳은 안진다리 주막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10여 년 전 마을 뒤쪽으로 전원주택이 들어서면서 ‘문화마을’이라는 생경生硬한 지명으로 바뀌었지만 토박이들은 아직도 ‘마분馬墳’이라고 부른다. 마분馬墳은 ‘옛날 뒷동산에 마정승의 묘가 있어 유래’ 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마馬’가 정승政丞을 뜻하는지 아니면 고귀한 신분의 말馬무덤을 의미하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분마을 경로당에서 인터뷰한 윤성O(2014년, 79세·여) 씨는 토박이다. 마을에서 나고 자랐고 일제 말에는 길 건너편의 고덕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전쟁 때 월남越南한 총각과 혼인한 뒤로 지금껏 마을을 지키며 살았다. 윤성O 씨는 안진다리주막을 기억했다. 일제 말 주막은 고덕면사무소 앞에 한 개 뿐이었다. 방 한 칸에 부엌 하나 달린 초가삼간의 자그만 주막집. 주막에서는 막걸리와 국밥을 팔았다. 그는 어릴 적 할아버지 품에 안겨 주막집을 자주 들락거렸다. 할아버지는 서정리장에 다녀오거나 면사무소 일을 보러 왔던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때때로 술이 거나해지면 어린 윤 씨에게도 술을 먹였다.

 

   
▲ 아홉거리와 서정리역으로 가는 길목 고덕면 율포2리

한국전쟁 뒤에는 최OO 씨가 옹정마을 입구에 고덕양조장을 창업하였다. 양조장이 생기면서 면사무소 앞과 옆 뒤쪽에 주막이 여러 집 생겼다. 이들 주막은 식당과 술집·여관을 겸했던 이전의 형태가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유행했던 선술집이었다. 주막마다 작부를 고용했던 것도 변화된 양상이었고, 매상을 올리기 위해 주모와 작부가 술자리에 동석하여 젓가락 장단을 맞춰주던 풍속도 전쟁 뒤의 현상이었다. 주막 가운데는 면사무소 앞의 것과, 후문 쪽 계루지로 넘어가는 언덕배기의 서울옥이 유명했다. 서울옥은 술만 팔았던 전문(?) 주막으로 주모의 미모도 반반했고 작부들도 예뻐서 남자들의 출입이 잦았다.
마분은 고덕국제신도시 개발지역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면사무소 주변과 옛 마분마을은 개발지역에 포함되었지만 새로 조성된 문화마을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래서인지 한쪽에서는 수 백 년 살아온 옛 터와 집들이 무너져 내리는 데도 길 건너편에서는 주택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은 이런 때 해야 하나. 

■ 주막집 이야기도 마을도 기억 속에만 남을 것
   
▲ 밤개울주막이 있었던 고덕면 율포2리
고덕면사무소에서 송탄 숯고개까지는 5.5km다. 옛날에는 숯고개를 넘으려면 아홉거리를 지나 갈평을 거쳤고, 서정리장을 가려면 갈평에서 갈라지거나 좌교1리 앉은다리와 율포2리 밤개울을 지나야 했다. 갈림길이었던 율포1리 북동쪽 아홉거리에도 주막이 있었다. 아홉거리는 <조선지지자료>에 ‘구기九岐’ 또는 ‘아옥거리’로 표기되었는데 나이 먹은 주모가 양아들과 함께 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1975년 경 주모가 피살되면서 보신탕집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고덕국제신도시개발로 흔적이 사라졌다. 율포리 ‘밤개울주막’은 근래까지 구멍가게 형태로 운영되다가 주민들이 흩어지면서 문을 닫았다.
고덕에서 평택까지는 20리(8km). 평택을 가려면 좌교1리 앉은다리를 건넌 뒤 여염리 장고개를 넘어 성머리와 지제동을 거쳤다. 안중방면으로 갈 때는 궁안교를 건너거나 38호 국도를 따라 걸었다. 필자가 윤성O 씨에게 배를 타고 건너지는 않았냐고 물었더니 청북면 백봉리 사람들은 서정리역을 갈 때 배를 타고 건너왔고, 해창리 사람들도 가끔 새우젓을 사거나 친척들 만나러 배를 타고 백봉으로 건너갔다고 말했다.
큰 도로를 사이에 두었지만 고덕초등학교 뒤편 옹정(도구머리) 사람들은 거리 감각이 조금 달랐다. 이들은 숯고개로 갈 때면 율포2리와 3리 사이의 함박산 아랫길을 따라 아홉거리와 갈평, 복창동을 지났고, 서정리역은 율포리 밤개울과 방죽말을 지났다. 시장은 가까운 서정리장을 많이 봤지만 소를 팔러 가거나 중요한 물품은 평택장에서 구입했다. 마을회관에서 인터뷰한 안OO(72세), 김종O(67세) 씨의 안진다리 주막에 대한 기억은 좀 더 구체적이었다. 그것은 술 마시고 노름하는 것을 지켜보며 가슴앓이 했던 여성들의 경험상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옹정사람들은 주막이 면사무소 앞 상가에 한 개, 후문 쪽의 서울옥, 이발소자리에 한 개 그리고 몇 개의 선술집이 더 있었다고 기억했다. 또 술집마다 작부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서울옥을 제외하고는 주모가 손님들과 장단 맞춰 놀아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60년대 초 면사무소 앞에서 주막을 운영했던 일본인 주모를 기억했다. 안OO(72세) 씨는 겨우 내내 안진다리 주막에서 술 마시고 놀은 뒤 추수할 때 마차로 쌀가마를 실어다 주었던 아버지를 기억했다. 그래서 필자가 ‘어머니께서 속 많이 태우셨겠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이장 일을 보는 김종상(61세) 씨가 얼른 나서서 ‘일제 때 구장일도 보시고 제1공화국 때는 고덕면의원도 지내셨기 때문에 그러시지 않았겠냐’고 변호하여 모두 웃었다.
수 백 년 낯 익었던 ‘좌교리’ ‘해창리’ ‘율포리’ ‘갈평’ ‘아홉거리’ ‘번성’과 같은 마을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이 떠나버린 옹정마을의 빈 집, 빈 골목마다 쓸쓸한 냉기가 돈다.

 
   
▲ 서정리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아홉거리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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