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
사회적·경제적 약자인
노동자·농민은
더불어 사는 세상
어디에 존재 하는가?

 

▲ 이상규 정책실장/평택농민회

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포근할 것이라는 날씨 예보와 달리 12월 들어 찾아온 한파가 기승을 부리며 그 기세가 쉽사리 꺾이지 않을 태세다. 이렇듯 날씨가 추워지면 우리들 주변에 있는 어려운 이웃의 이야기와 그들을 돕는 따뜻한 손길들의 이야기가 방송과 신문에 여느 때보다 자주 등장하곤 한다.
겨울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에게는 정말로 혹독한 계절이며 견디기 힘든 시절임에 틀림없다. 집안 곳곳 갈라진 틈으로 들어오는 동장군의 위세를 연탄 한 장에 의지해 꽁꽁 언 손과 발을 녹이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어려운 이웃들이 우리 주위에 많다. 때로는 이 연탄 한 장이 없어 차디찬 겨울밤을 지새우는 그들의 가슴 아픈 사연은 우리들의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우리 이웃의 고통 받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우리는 함께 가슴 아파하고 동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온정의 손길을 뻗히기도 하지만 무엇인지 모를 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어려운 이웃들의 문제가 나와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 때문은 아닐진대 왠지 모르게 미안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그게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어느 성자의 말처럼 내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하고 내 일처럼 아파하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예의’ 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달리 사회적 경제적 약자인 노동자·농민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인색해져 있지 않은가 되돌아본다.
얼마 전 대법원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해고무효 확인 소송에 대해 노동자의 손을 들어준 고등법원의 판결을 깨고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는 회사의 경영상 필요했다며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그동안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공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던 해고노동자들은 더 이상 기댈 곳도 갈 곳도 없어졌다.
결국 해고노동자들은 또다시 살기위해 살을 에는 듯한 엄동설한 추위에 칼바람을 피할 곳도 누울 곳도 없는 70m 공장 굴뚝에 다시 올랐다. 사실 이들의 요구는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다. 회사와 대화할 수 있는 교섭 자리 마련이다. 회사도 정치권도 그 누구도 그들의 절절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누가 이들을 혹한 추위에 저 높은 공장 굴뚝으로 올려 보냈는가? 어느 곳에도 기댈 곳 없는 해고노동자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 사회가 이들을 공장 굴뚝 위로 올려 보낸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15년 쌀 수입 전면개방과 우리 농업에 핵폭탄과도 같은 한·중FTA로 인해 벼랑 끝에 몰린 농민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힘들고 돈도 되지 않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기에 농업을 천직으로 알고 묵묵히 농사짓는 힘없는 농민들에게 어떤 희망이 존재한단 말인가? 누구라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 만들지 못하는 게 없다지만 공장에서 쌀을 만들 수는 없다. 지금이야 싼값에 바다건너 농산물을 가져올 수 있다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농민들이 손에 든 삽자루를 내려놓고 우리의 들녘이 풀밭으로 변하고 논밭에 건물이 들어선다면 과연 누가 우리의 먹거리를 책임진단 말인가?
절박하고 기댈 곳 없는 이들의 아픔과 처절한 외침을 우리들이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자.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고 하는 작금의 시대에 이들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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