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가 주류를 이루던 때, 신문은 한국 사회의 버팀목이자 지표였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었다. 비록 현상의 어려움과 온라인의 속보성, 아니 어쩌면 그 자극적인 글귀들의 홍수 속에 파묻혀 빛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신문이 가지는 향수 혹은 펜 끝의 날카로움은 여전히 독자를 향해 있다.
비록 중앙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역신문은 지역을 아우름에 있어서만큼은 중앙지보다 더 앞선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창간’이라는 산고를 겪고 지역신문 기자로 또 한 해를 보내는 지금, 뇌리에 가득차 넘쳐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다.
대학 교수들이 올해를 정리해 표현하는 사자성어로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는 뜻의 ‘엄이도종’(掩耳盜鐘)을 선정했다고 한다. 자기가 한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비난이나 비판을 듣기 싫어서 귀를 막아보지만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혹시내 귀 이야기는 아닐는지, 정론이라는 거창한 논제를 내걸고 있으면서도 편견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는 엄중한 의미로 다가오는 말이다.

다름과 틀림의 차이
크리스마스 전야를 하루 앞둔 그날의 동삭동, 연인들의 가슴속으로 화이트크리스마스를 예고하는 함박눈이 쏟아지던 그날, 텐트 하나에 의지해 추위를 녹이며 모여 앉은 사람들의 어깨에 내린 눈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담장 저편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부동자세로 서 있는 젊은이의 눈에 비친 눈발은 어떤 색이며, 밤새 제설작업을 하던 이들에게 눈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눈이 내렸다는 한 가지 사실을 가지고도 각기 다른 수많은 사연과 사건과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며, 세상의 다양성에 대한 작은 가르침을 떠올려본다.
상대의 의견이 자신과 다르다고 그것이 곧 틀린 것이라는 사고는 다툼의 씨앗으로 남는다. 나에게 불리한 것은 불합리요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 역시 갈등의 뿌리다. 결국 지난 한해 평택을 떠들썩하게 했던 쌍용차문제, 브레인씨티문제, 지구단위 개발문제 및 여타 사건 사고들 역시 다름과 틀림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온 것이 대부분이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때로는 상대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실력행사를 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다수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소수가 희생을 강요당하는 일도 없어야겠다. 내가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해주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의 곤궁함이 내일의 과실보다 더 크고 빠르게 다가오기 때문에 용기의 실천에는 고난이 따른다.
축복은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쌓여서 온다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이 더 많았고 웃는 날이 더 많았던 한 해였다고 해도  몇일 남지 않은 올해를 보내면서 항상 힘들고 아쉬웠던 일만 기억나는 것은 왜일까.
2012년에는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기대할 것이 별로 없더라도 새해에 포장지를 헤치고 나올 축복을 얻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매주 신문이 나오고 독자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시간들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것은 기자 역시 다름에 대한 수용이 부족한 탓이다. 다행히 이제 겨우 걸음을 뗀 지역언론에 대한 독자들의 너그러움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강성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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