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성주막은 내포에서 포승 만호리 솔개바위나루
화성 장안나루에서 포승 홍원리 호구포를 지나
안중장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에 있었다

 

 

은성주막은 서평택지역
주요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교통로 중심에 주막이 있다 보니
오가는 행인들도 많았고
주막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처음에는 은성방앗간 방향으로
두어 개가 운영되다가
일제강점기 안중장이 번성하면서
큰길 좌우로 13개까지 늘어났다.
은성주막의 모습도 초가삼간에
평상 하나를 내어 놓은 모습이
여느 주막들과 다르지 않았다.
해방 후 잡화와 술을 함께 파는
선술집들도 여러 집 생겼다.
 

  

 

 

▲ 안중읍 성해리 석정삼거리에 위치한 은성주막거리

- 내포와 화성, 안중장의 연결고리 은성주막

주막은 ‘길의 정거장’이었다. 삼남대로처럼 큰길가의 주막은 왕도 쉬었다가고 고관대작과 부상대고들도 머물다 갔다. 지역과 지역,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던 작은 길목에는 민중들의 주막이 있었다. 민중들은 주막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허기진 배를 채웠으며 세상소식을 접했다. 때론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의장소가 될 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옛 주막에는 사람냄새, 다양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잊혀져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 우리의 자화상이며 그리움이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8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그리고 주막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 놓으려 한다. 독자들의 애정과 관심을 기대한다.
 - 편집자 주 -

 

 

▲ 안중읍 성해리 은성주막거리
▲ 안중읍 성해리 옛길
■ 서해안 상업의 중심 안중장
서평택지역은 육로보다는 수로나 해로교통이 중심이다. 북쪽으로는 발안천, 남쪽으로 안성천 하구, 서쪽의 아산만이 육로교통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근대이후 안중장은 서해안 상업의 중심이었다. 안중장의 주요 상품은 농우農牛였고 그밖에도 돼지와 닭, 아산만의 소금과 생선이 거래되었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안중 우시장은 근동에서 유명했다. 장터도 컸고 거래량도 많아서 아산만 반대편의 내포지역, 발안천 건너 화성시 장안면 일대, 오성면과 평택에서까지 소를 사고 팔기위해 모였다.
안중장이 서해안 상업벨트의 대표적인 장시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서평택 일대의 황무지와 간석지가 간척되면서 많은 수의 농우農牛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초기에는 일본인 농업이민자들도 안중시장 근처에 정착하였다. 일본인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 안중초등학교와 안중금융조합, 성공회 안중교회 그리고 일본인들의 수요에 따라 잡화점, 자전거점, 식당과 여관, 고급 요정들이 자리를 잡았다. 안중장을 중심으로 완만하게 발전하던 안중읍이 지금처럼 성장한 것은 1990년대 이후다. 평택항의 확대와 서평택지역 공업화의 중심 배후도시로 발전하면서 안중장에만 의지했던 전통적 상업도시가, 아파트와 상업지역, 행정과 문화시설이 고루 조화를 이룬 현대화된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 안중읍 성해리 옛길
▲ 은성이라는 지명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은성정미소

■ 내포와 화성 그리고 안중장의 매개역할

▲ 안중읍 성해2리
▲ 간척 뒤 김종욱 씨가 분배받았던 토지였던 까치당골 들판
‘은성주막’은 안중읍에서 포승읍 만호리로 연결된 국도 38호선과, 안중읍 성해리에서 장안대교를 건너 화성시 장안면과 연결된 지방도 313호선의 갈림길에 있다. 이곳에서 안중장까지는 오리, 홍원리까지는 시오리, 만호리까지는 이십여리다.
내포지역 서산 당진의 소장수들은 한진나루에서 커다란 한선(조선배)에 소를 가득 싣고 만호리 솔개바위나루에서 내린 뒤 국도 38호선을 따라 안중장으로 향했다. 화성사람들은 장안면 장안나루에서 배를 타고 포승읍 홍원리 범구지 근처에 있었던 호구포에서 내렸다. 호구포에서 내리면 홍원마장이 지척이었고, 마장을 지나 10여 리를 걸으면 은성주막이 나타났다. 홍원리의 마장은 조선시대 국영國營 마장馬場이었다. 이곳에서는 군용 말들과 국가나 대신들이 사용할 축우畜牛를 길렀다. 어쩌면 조선시대 홍원마장에서 일했던 관원과 목부들도 은성주막을 거쳐 한양을 오갔을 것이다.
이처럼 은성주막은 서평택지역 주요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교통로의 중심에 주막이 있다 보니 오가는 행인들도 많았고 주막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막은 처음에는 은성방앗간 방향으로 두어 개가 운영되다가 일제강점기 안중장이 번성하면서 큰길 좌우로 무려 13개까지 늘어났다. 은성주막의 모습도 초가삼간에 평상 하나를 내어 놓은 모습이 여느 주막들과 다르지 않았다. 해방 후에는 잡화와 술을 함께 파는 선술집들도 여러 집 생겼다. 손님들은 마루나 평상에 걸터앉아 부침개나 두부김치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때론 김주영의 소설 ‘객주’ 의 송파객점 풍경처럼 소 값 후려치는 우시장 중개상인이야기, 미곡시장 말감고의 기막힌 손놀림도 안주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교통의 요지에 주막이 번성하면서 텃세를 부리고 주먹을 휘두르는 부류들도 생겨났다. 은성마을 주민 김종욱(88세) 씨는 1950~60년대 전설적 인물이었던 현화2리 이OO를 기억했다. 체구가 당당하고 눈매가 무서웠던 이 씨는 수하들 몇을 거느리고 은성주막을 지나가는 상인들과 행인들을 괴롭혔다. 주로 내포지역이나 화성에서 오는 상인들을 괴롭혔는데 이 씨가 무서워 그냥 지나치려면 ‘누구 허락받고 지나 가냐’며 시비를 걸었고, 주막에 들른 사람들에게는 강제로 술을 사게 하거나 통행세와 술값으로 돈을 뜯어냈으며, 혹여 인사라도 하지 않으면 주먹으로 두드려 팼다. 처음에는 술을 담가서 팔았던 주막집들도 일제강점기 밀주단속을 하면서는 양조장에서 술을 배달받아 팔았다. 이 씨는 주막집이 아닌 양조장에서 술을 직접 사다 먹는 사람들도 단속(?)하였다. 무법천지의 세상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뒷골목 황제의 삶이었다.

■ 교통수단이 도보에서 자동차로 바뀌며 쇠퇴

▲ 김종욱 씨가 처음 정착했던 포승읍 홍원리 범구지 일대
은성마을 버스정거장에서 만난 박인재(73세) 씨는 토박이다. 그는 포승읍 홍원2리 마장마을에서 성해1리 성바께 마을 총각과 혼인한 뒤 줄곧 은성에서만 살았다. 남편은 서울의 양복점에서 양복기술자로 일했지만 큰형님이 늦은 나이에 입대를 하는 바람에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낙향 후에는 은성주막거리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양복점을 운영했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국도 38호선을 걸어 안중중·고등학교와 안일중·고등학교에 다녔던 학생들이 많아서 양복점은 잘 운영되었다. 남편이 양복점을 접은 것은 1980년대였다. 당시 제5공화국 정부는 교복자유화를 선언했는데 그 영향으로 맞춤교복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양복점 운영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농지래야 논 8마지기에 불과했던 박인재 씨 부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검약하고 성실한 노력으로 버텨냈다. 덕분에 자녀들은 고등학교·대학교를 마치고 좋은 직장, 좋은 남자와 혼인하여 잘 살고 있다.
김종욱(88세) 씨는 전쟁피난민이다. 1·4후퇴 때 부모님과 형제들을 고향 평양에 놔두고 혈혈단신 월남하여 포승읍 홍원리 뱃목에 정착했다. 부모친척도 돈도 없었던 가난한 피난민 청년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다가 1955년 차연농 씨가 피난민 300세대를 모아 시작한 연백사업장 간척에 참여했다. 간척사업은 힘들고 고되었다. 피난민들은 일제 말 안중읍 덕우리 이강세 씨가 간척했다가 실패한 일명 ‘강세둑’을 삽과 지게, 가래만으로 막았다. 나중에 둑 위에 탄광에서 사용하는 레일을 깔고 손수레로 흙을 운반하면서부터는 일이 쉬워졌다. 하루 종일 둑을 막으면 임금으로 전표가 지급되었다. 전표를 가져가면 구호품으로 나온 밀가루나 식량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노력하여 간척이 성공하자 농지를 분배했다. 농지는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는 1세대에 3200평씩, 그렇지 않은 세대는 3000평씩 분배되었다. 김종욱 씨가 분배받은 농지는 성해2리 해조마을 앞에 있었다. 그래서 성해2리와 가까운 은성주막거리로 이사하였다.
간척농민들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간척 후 5년간이었다. 염분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5년 동안 피난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만 했다. 은성마을로 이주한 김종욱 씨는 생선 장사를 했다. 처음에는 자전거를 한 대 사서 만호리에서 생선을 도매한 뒤 안중장이나 고덕면 일대에 팔았고, 나중에는 오토바이를 구입하여 고덕면·오성면·평택장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염기鹽氣가 제거되면서부터는 장사를 접고 농사를 지었다. 1974년 남양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부터는 안정적인 농업용수 공급으로 농사도 살림도 나아졌다.
은성주막은 1970~80년대 국도 38호선이 확포장 되고 집집마다 자가용을 구입하면서 크게 쇠퇴하였다. 농업기계화의 영향으로 안중우시장이 쇠퇴한 것도 한 몫 했다. 버스정류장 옆의 주막은 주인할머니가 돌아가시며 문을 닫았다. 길옆의 주막들은 도로확장으로 가옥이 수용되면서 폐점되었다. 세상물정이 변하면서 새로 주막집을 개업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중국인들이 ‘저 장강長江의 도도한 물줄기를 누가 막으랴’고 부르짖었듯, 번성하던 은성주막도 역사의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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