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1월 6일

원평동 소재, 일제강점기 유도·검도 유행
김승학 사범 지도, 20일간 동계훈련 실시

 

 
 “京釜線 平澤驛前에 있는 平澤武道舘에서는 去 六日부터 約 二十日間 豫定으로 師範 朴承學氏 指導下에 十餘名의 會員이 每朝 五時부터 約 二時間의 冒寒練習을 擧行 中이라는 바, 其 期 限 中의 入門希望者에게는 入門 會費 免除로 歡迎한다 하며, 다시 當地 有志의 李敏斗氏를 舘長으로 推戴하였던 바, 同武道舘에서는 氏로부터 적지 않은 物質的 援助를 받았다 한다”(동아일보 1933년 1월 20일)

1919년 3·1운동 이후 1920년대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붐은 ‘교육열’과 ‘운동열’이었다. 여기에 더해 운동이 전국적으로 붐을 일으킴에 따라 각지에 교육기관이 설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운동을 할 수 있는 체육관 등도 건립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관심을 갖고 급격하게 늘어난 운동은 유도와 검도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의식이 강한 태권도는 사실상 맥이 끊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당시로서는 일종의 출세를 위해서도 태권도보다는 유도나 검도가 유리했다.
일본의 상징적인 운동인 유도와 검도가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1921년경이었다. 당시 언론에 의하면 일본에서 유도와 검도를 배운 강낙원이 전문적으로 무도(武道)를 가르칠 목적으로 서울 낙원동 오성강습소 안에 ‘무도관’을 설치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무도관은 전국 각지에 보급되기 시작했고 해마다 대규모의 승급시험을 개최했다. 유도와 검도는 식민정책과도 맞물려 보다 빠르게 정착됐다. 이는 유도와 검도를 통해 일본정신을 보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평택에도 무도관이 보급되었는데 언제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33년 1월 6일부터 20일간 평택무도관에서 모한연습(冒寒練習)을 한 바 있다. 모한연습은 추위를 극복하는 훈련으로 당시 유도인이나 검도인 등 무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였다. ‘무도계에서 가장 장엄하다’고 할 정도로 의미를 두었다. 엄동설한 추울 때도 추운 줄 모르는 철혈아를 만들기 위한 훈련이었다.
평택역 앞, 현재의 원평동에 있었던 평택무도관은 새해를 맞아 1월 6일부터 20일간 매일 새벽 5시부터 2시간씩 10여 명의 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모한연습을 했다. 당시 모한연습은 사범 김승학의 지도로 진행됐다. 이 기간 입문하는 회원에게는 입문회비를 면제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평택무도관은 지역 유지를 관장으로 추대했는데 이때 이민두(李敏斗)를 관장으로 추대했다. 관장으로 무도관을 지원했던 이민두는 평택리에 거주하는 유지였는데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백미 500가마를 기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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