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날의 우리들

 


- 상익아, 어디 가냐?
-  아니요. 할아버지 오시나 해서
기다리고 있었죠
-  기다리긴, 인석아. 이 할애비가
길 잃어버렸을까 봐 그러냐!


친구가 불러서 잔칫집에 갔다가
오랜만에 만나 친구들과
약주를 드시느라 늦으셨다며
할아버지는 비닐봉투에다
먹을 것을 수북하니 담아 오셨습니다

 

 
창문 한쪽 작은 화분 속 꽃잔디에 따사로운 겨울 햇살이 내려앉는 오후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상익이가 빠끔히 바깥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둑한 부엌건너 안방에는 환한 햇살만 가득할 뿐 인기척이 없습니다.
- 상익아! 얘 상익아! 어서 일어나 인석아!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부엌문턱에 걸 터 누웠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지 누가 부르는 소리에 얼핏 눈을 떠보니 할아버지가 서 계십니다.
- 일어나 거라. 배고프겠다. 어서 이거 먹자.
12월이라고는 하지만 한낮의 따가운 햇살 탓인지 이마에 송송 땀이 맺히는 줄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졌던 모양입니다.
- 할아버지 어디 갔다 오세요?
할아버지는 묵직하고 불룩한 검정 비닐봉투를 방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 이게 뭐예요?
- 일어나서 같이 먹자꾸나
할아버지는 비닐봉투 속에서 마개가 따진 사이다 한 병과 떡, 전을 내놓으셨습니다.
- 할아버지 이거 뭐죠?
- 보면 모르니? 인석아. 먹는 거지. 뭐긴 뭐야?
- 아니, 어디서 났냐구요?
- 어디서 나긴. 이런 걸 누가 그냥 주냐. 친구가 오라고 해서 잔칫집에 가서 실컷 얻어먹고는 네 생각이 나서 가져온 게지
- 할아버지 또 술 잡수셨구나. 에이, 술 냄새
- 오냐, 한잔 했다
지난 일요일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나가신 할아버지는 저녁 무렵이 다 되었는데도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각까지 오시지를 않으니 집안 식구들이 걱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 상익아, 어디 가냐?
- 아니요. 할아버지 오시나 해서 기다리고 있었죠
- 기다리긴, 인석아. 이 할애비가 길 잃어버렸을까 봐 그러냐!
친구가 불러서 잔칫집에 갔다가 오랜만에 만나 친구들과 약주를 드시느라 늦으셨다며 할아버지는 비닐봉투에다 먹을 것을 수북하니 담아 오셨습니다.
- 여기두 뭐가 들어있는데…
할아버지 외투 호주머니에는 휴지로 마개를 만들어서 끼운 소주 한 병이 들어있습니다.
- 아버님도, 그런 건 왜 갖고 오세요
- 먹을 수 있는 것 버리니 어떡하니… 먹을 걸 버리믄 벌 받는다
할아버지는 찬장 속에다가 소주병을 소중하게 간직하셨습니다.
- 할아버지 오늘은 또 무슨 잔치였어?
- 음, 친구 손자 결혼식이었다
- 잔치가 맨날 있었으면 좋겠다. 떡도 먹고 빨갛고 파란 색동사탕도 실컷 먹을 수 있으니까 그치, 할아버지?
그 다음 일요일에도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떡이랑 사과랑 사이다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할아버지가 가져온 사이다는 늘 마개가 따진 것들이었습니다. 또 사과는 예쁘게 깎아서 얇게 썬 것이었는데 오래 되서 그런지 색깔이 누렇게 변해 있습니다.
- 아이, 이제는 맛도 없다
- 맛이 없다니, 네가 배가 불렀구나. 이 할애빈 언제 먹어도 맛있더라
눈이 올 듯 말듯 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눈이 쏟아져 내립니다.
- 상익아! 상익아! 여기야 여기
역전 광장을 지나 중앙예식장이 어딘가 해서 찾고 있는데 어디에서 순규 목소리가 들려서 올려다보니 순규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듭니다. 순규 외삼촌 결혼식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는데 지하에 있는 식당 안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 형! 형! 여기 국수 줘! 떡두 주구. 얜 내 친구 상익이야
오랜만에 먹어보는 잔치국수라서 그런지 아침을 먹은 지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한 그릇은 좀 적은 것 같습니다.
- 형! 여기 국수 두 개 더!
순규가 국수를 달라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상익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건너편 식탁에서 할아버지가 검정 비닐봉투에다 상 위에 있는 먹다 남은 음식을 골라서 담고 계셨습니다.
- 상익아! 나 위에 가서 가족사진 찍고 올게. 여기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순규가 밖으로 나가자 상익이도 부리나케 따라 일어나 문 쪽으로 가서 기둥 뒤에 숨어서는 할아버지를 지켜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소주병에 남은 소주를 하나하나 빈 병에다 옮겨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늘 집에 가지고 오신 소주병처럼 휴지를 말아 마개로 만들어 끼웠습니다.
- 우리 할아버지가 아닐거야! 할아버지가 아니야!
하지만 눈을 씻고 보아도 분명히 낡은 등산모자를 쓴 할아버지였습니다. 상익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와 땡땡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웠습니다.
얼마가 지났을까? 부엌문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상익이는 눈을 꽉 감고 자는 체 했습니다
- 상익아!  상익아! 어여 일어나 이거 같이 먹자 오늘은 할애비가 고기도 가지고 왔다. 어여 일어나래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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