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문포가 있었던 안성천 군문교 일원
 

조선후기 군문포는 충청수영로의 관문이었다
군문포의 본래 이름은 군물포로 1849년 청일전쟁 때
청군清軍이 상륙하면서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군문포가 충청도로 건너가는
육로·수로교통의 관문이었다면
통복개·신덕포·화포·고잔포·삽교포는
아산만 어염魚鹽이 거래되던
상업포구였다.
주민들은 썰물 때에는
갯골을 따라 들어온 배들이
화포와 고잔포에 닿았고,
밀물 때에는 통복개까지
들어갔다고 말했다.
특히 신대동 고잔포는
안성천 하류와 아산만
경기만의 덕적도와 용유도 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1 - 서해안의 어염魚鹽이 드나들던 군물포와 고잔포

평택은 물의 고장이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40여 개나 되는 하천이 평택평야를 가로질러 아산만으로 흘렀다. 바다와 하천은 수로, 해로교통의 수단이었고, 갯벌은 수산자원의 보고였으며, 나루와 포구는 교통과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나루·포구, 그 위의 삶’을 연재한다. 물과 함께 살아온 평택사람들의 삶을 함께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군문포가 있었던 군문1동
▲ 안성천에서 가장 먼저 콘크리트 교량 으로 건설된 군문교

■ 물과 함께 살아온 천변川邊 사람들
평택은 물의 고장이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40여 갈래의 물줄기로 바닷물이 밀려들면 평택평야는 온통 바다로 변했다. 바닷물이 밀려왔다 밀려나간 자리는 생명의 보고寶庫였다. 어부들은 갯골에 그물을 치고 숭어·강다리·우어·준치를 잡았고, 천변川邊 아낙네들은 치마를 걷어붙이고 말조개와 부전조개(재첩)·참게를 잡았다. 사회적 신분과 빈부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모여 살 수 있었던 곳, 그곳이 천변이었다.
평택지역의 가장 큰 하천은 안성천과 진위천·발안천이다. 큰 하천에 뿌리를 두고 오산천·황구지천·통복천·관리천·도일천·도대천이 흐르고, 또 크고 작은 하천에 뿌리를 두고 수많은 하천들이 흘렀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 때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드나들던 하천은 인간의 삶과 소통에 큰 장애였다. 불가피한 환경 앞에서 사람들은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지만 오랫동안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다.
나루와 포구는 천변川邊의 교통시설이고 군사시설이었으며 어업과 상업의 중심이었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하천에 막힌 육로교통을 나루를 통해 연결하였고 때론 수군의 주둔지로 삼았으며, 바다와 인접한 포구는 포구상업과 어업의 전진기지로 활용했다.
세곡稅穀이나 소금처럼 부피가 크고 무거운 상품, 대규모 상단이나 군대의 운송도 나루와 포구가 담당했다. 조선시대 안성천 변에는 수많은 나루와 포구가 있었다.
18세기 전반에 편찬된 <팽성지>에도 신덕포·삽교포·통복개가 나오고,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에는 군물진, 19세기 말의
<진위읍지>에는 고잔포가 나타난다. 그밖에도 군문동에는 간포, 유천동에는 군두포, 안성천 건너편 팽성읍에는 원봉나루·석봉나루도 있었고, 좀 더 하류로 내려가면 더 많은 나루와 포구들이 있었다. 

 

▲ 안성천의 겨울(군문동 일대)
▲ 일제강점기 1등도로와 군문주공아파트

■ 충청대로의 관문關門이었던 군문포
안성천 변의 포구들은 수적으로도 많았지만 각자의 역할도 다양했다. 예컨대 통복동의 화포와 신덕포·통복개, 신대동의 삽교포, 군문동의 간포와 유천동의 군두포가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면, 군문포나 팽성읍의 원봉나루는 육로교통의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조선후기 군문포는 충청수영로의 관문이었다. 본래 충청수영로는 진위고을의 칠원1동 갈원에서 삼남대로와 갈라져 한 갈래는 소사교를 건너 성환읍의 신가리, 농촌리를 거쳐 평택고을(팽성읍)을 지났고, 다른 갈래는 동삭동 서재마을과 통복동을 거쳐 군물포에서 나룻배를 타고 팽성읍 석봉리 원봉나루로 건너갔다.
군문포의 본래 이름은 군물포. 1894년 청일전쟁 때 청군淸軍이 상륙하면서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군문포가 충청수영로의 요지이다 보니 근대 전후에는 통복점이라는 주막도 있었다.
개항 후에는 조선의 미곡을 수집하려던 일본상인들도 포구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1893년 충청도 관초에는 보지조保之助라는 일본 상인이 군문포에서 대규모로 곡물을 매입하자 충청도 관찰사가 방곡防穀을 명분으로 압수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충청도로 건너가는 관문에 불과했던 군문포가 세상 사람들의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부터다.
일제는 철도를 부설한 뒤 대전이나 김천·평택과 같이 국·공유지와 미간지未墾地가 많은 지역에 철도역을 설치하였다. 그래서 설치된 역驛이 평택역과 서정리역. 그 중에서 평택역은 안성천 변의 드넓은 국·공유지와 미간지 그리고 아산만 일대의 어염魚鹽의 집산지로 각광을 받았다.
수탈 대상이 많아지면서 일제강점 초기부터 일본인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그래서 형성된 도시가 원평동 구 평택시가지와 평택장이다.
철도역 주변으로 장시가 발달하면서 군문포는 평택역과 평택장의 배후 나루로 역할 하였다. 서해안의 어염魚鹽과 안성천변의 개간지에서 거둬들인 미곡이 안성천 수로를 통해 군문포로 들어왔으며, 일제강점기 군문동에 대규모 정미소가 설립되면서부터는 오성면과 현덕면·팽성읍 일대의 농민들이 배에다 벼를 싣고 군문포로 들어왔다.
군문포에 있었던 정미소는 ‘영단방앗간’이라고 불렀다. 이 정미소는 처음에는 일본인이 운영했다가 해방직후 윤씨네가 인수하면서 ‘윤OO씨네 방앗간’으로도 불렸다. 

 

▲ 고잔포가 있었던 신대동 고잔마을
▲ 통복동 신덕포 마을

 
■ 군문교가 놓이면서 기능이 약화돼
군문포가 충청도로 건너가는 육로교통과 수로교통의 관문이었다면 인접한 통복개·신덕포·화포·고잔포·삽교포는 아산만 어염魚鹽이 거래되던 상업포구였다. 주민들은 썰물 때에는 갯골을 따라 들어온 배들이 화포와 고잔포에 닿았고, 밀물 때에는 통복개까지 들어갔다고 말했다.
특히 고잔포는 안성천 하류와 아산만 그리고 경기만의 덕적도와 용유도 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고잔포의 위치는 신대동 크리스찬국제학교 앞이다. 이곳에는 주로 세우젓배·굴배·강다리배와 각종 생선배·소금배들이 닿았다. 배가 들어오면 마을사람들은 새우젓독·굴독·소금가마를 지게에 져서 마차에 실었다. 주민들은 이것을 ‘하륙작업’이라고 말했다.
하륙이 끝난 어염魚鹽은 일부는 평택역으로 실어가거나 평택장 새우젓도가나 소금도가에서 매매되었고, 또 일부는 소매상들이 네모지고 작은 멧꾸리에 담아 지게에 지고 마을을 돌며 팔았다. 겨울철에 들어왔던 어리굴젓은 상인들이 작은 애기지게에 지고 다니며 곡물과 교환하였다. 비린반찬이 귀했던 시절 굴장수들이 팔았던 어리굴젓은 귀한 반찬이었다.
고잔마을 최OO(88세·여) 씨는 자신의 시댁은 살만해서 어리굴젓을 자주 구입했는데 시집와서는 귀해서 시아버지 밥상에만 조금씩 올려드렸다고 말했다.
군문포 일대의 나루와 포구들은 근대 이후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타격을 입었다. 물산의 유통경로가 철도와 육로교통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평택역 일대에 가장 먼저 가설된 도로는 국도 1호선과 국도 45호선이다. 육로교통이 발달하면서 배로만 건너다닐 수 있었던 안성천에도 다리가 놓였다. 가장 먼저 놓인 다리는 군문교와 유천교다.
군문교는 건설 당시에 ‘평택교’라고 불렀다. 평택교는 처음엔 목교木橋였다가 홍수와 급류로 자주 유실되면서 1930년 최초의 콘크리트 다리로 신축되었다. 안성천 교량 가운데 군문교가 가장 먼저 놓인 것은 평택역을 중심으로 하는 상권과 충청수영로 최대의 상권이었던 둔포 상권과의 관계성 때문이었다. 당시 둔포는 충청수영로가 지나는 육로교통의 중심이면서 둔포천을 통해 아산만·경기만 일대의 어염魚鹽이 거래되던 상업의 중심지였다.
군문교가 건설되면서 군문포의 나루기능은 거의 중단되었다. 일제 중반 신대교 건설도 삽교포의 쇄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이웃마을의 신덕포나 화포·고잔포만이 1960년대 이전까지 어염魚鹽의 거래로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은 군문포와 삽교포에서 나룻배를 탔던 기억을 갖고 있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주민은 군문포와 삽교포는 나루였던 적이 없었다고 억지(?)를 쓰기도 했다.
근래에는 원평동주민자치위원회에서 주최하는 축제에서 조차 ‘군문나루’를 ‘원평나루 갈대·억새축제’라는 족보에도 없는 명칭을 붙이는 사례까지 있는 것을 보면 그놈의 기억이란 것 써먹기 나름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조선 전기 명문장 서거정은 부용산 관가정에서 내려다 본 안성천의 풍경을 ‘휘돌아 감아 도는 물길에 돛대를 세운 고깃배들이 한가로이 떠다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우리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만 그것은 그리움일 뿐 현재 우리의 눈은 미래를 향해서만 열려있다.

 

▲ 화포가 있었던 통복동 화촌마을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부사장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