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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3. 나루·포구 그 위의 삶>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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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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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포나루는 팽성읍의 곤지진이나 원봉나루,
진위천 건너 오성면의 새터나루로 연결되었다
계절에 따라 새우젓·어리굴젓·소금 배도 드나들었다

 
   
▲ 이포나루가 있었던 동고2리 큰말

 

바닷물이 드나들던 시절
동고리 사람들은 가난했다.
어선이 드나들었지만
어업으로 생계를 잇지는 못했고,
상선이 드나들었어도 포구상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도 없었다.
육답은 소출이 좋은 편이었지만
해답海畓은 걸핏하면
수해와 염해를 입어
수확량이 크게 떨어졌다.
가난한 소작농들은
보릿고개가 되면 식량이 떨어졌다.
그러면 장리쌀을 얻거나
품팔이를 하였다.


 

  

 

 
   
▲ 고덕면 동고리 옛 이포나루터(1976년)
   
▲ 신환포가 있었던 동고2리 신환포 마을

2 - 이포나루는 어떻게 되었을까?

평택은 물의 고장이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40여 개나 되는 하천이 평택평야를 가로질러 아산만으로 흘렀다. 바다와 하천은 수로, 해로교통의 수단이었고, 갯벌은 수산자원의 보고였으며, 나루와 포구는 교통과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나루·포구, 그 위의 삶’을 연재한다. 물과 함께 살아온 평택사람들의 삶을 함께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역사 속의 큰 나루였던 이포
   
▲ 바닷가 마지막집이었던 동고1리 남창희씨 집
   
▲ 동고1리 정자동과 갯물이 드나들던 궁논들 일대
안성천 유역의 나루와 포구 가운데 ‘이포’라는 이름은 가장 생경生梗하다. 하지만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수원부 조에는 ‘이포진은 금물촌면(오성면)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19세기의 <수원부 읍지>에도 ‘평택현으로 넘어가는 나루’라고 기록되었다. 또 19세기 중반에 편찬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수원부 남쪽 70리 지점에 있으며 평택으로 통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최소한 1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안성천의 대표적인 나루였음이 확인된다.

안성천과 진위천이 정비되기 전까지만 해도 두 하천의 물길은 오성면 안화리와 신리 일대를 휘돌아 고덕면 동고리 부근에서 합류하였다. 1911년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를 살펴봐도 고두면(고덕면)에 오성면 안화리, 신리, 교포리가 포함된 반면, 고덕면 궁리, 동고리, 해창리, 지제동 울성마을은 오타면(오성면)에 속하였다.

또 오성면 창내리 일대는 옛 평택현 소고니면이어서 지금과는 사뭇 다른 지형을 갖고 있었다. 현재와 같은 지형은 조선후기 이래 계속된 간척과 안성천, 진위천의 하천정비사업의 결과다.

하늘이 맑은 1월 초 고덕면 동고리 답사에 나섰다. 안성천 변에 형성된 동고리는 마을 주위로 물이 휘돌아 흘러 ‘뒝구리’라고 불렀다. 하늘은 맑은 데 기온이 낮아서인지 골목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동고1리 정자말을 지나다가 요즘 보기 드문 정미소가 있어 사진을 찍는데 7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 분이 ‘왜 찍어요?’라고 물어온다. ‘요즘에는 이런 정미소 보기가 힘들어서요’ 라고 말했더니, ‘우리 집 정미소가 문화재급이긴 하다’며 웃는다.

정자정미소 허순례(75세)씨는 충남 서천이 고향이다. 부여군 화양면에 사는 총각을 만나 결혼하였고 평택에는 1970년대 후반에 올라왔다. 1970년대 후반 남편은 동고2리 큰말 앞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다가 폐업했는데 생계가 막막했다. 그래서 1984년 아들과 함께 이웃마을 정미소를 다시 인수하여 경영한 것이 정자정미소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정미소집과 양조장집은 대표적인 부자였다. 늦가을 추수가 끝나면 정미소 앞에는 도정搗精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좋은 순번을 얻으려고 청탁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교통이 발달하고 도정搗精 방식이 바뀐 요즘 정미소는 폐업 직전이다. 굳이 동네 정미소를 이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도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순례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사무실 안에 있던 남편 조길연(84세) 씨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미소 사업이 실패한 뒤에도 다양한 사업경험을 갖고 있는 조 씨는 근래에는 축력발전소를 고안하고 있다고 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 이포나루가 소청나루로 바뀌어
   
▲ 궁논들 원골 그리고 장터거리 원경
   
▲ 동고리 정자동에서 태평아파트 가는 길
동고2리는 ‘큰말’로 통칭된다. 큰말은 해방 전후에도 70호가 넘었고 지속적으로 간척이 진행되면서 90호 이상으로 늘었다가 근래에는 연립주택 건립으로 400세대가 넘는 큰 마을이 되었다.

큰말은 본래 윗뜸, 중뜸, 아랫뜸 세 마을로 구분되었다.

윗뜸에는 신창말과 수어창리, 소청말, 중간뜸은 구창리, 아랫뜸은 신환포리가 있어 행정적으로도 나눠졌다. 당시만 해도 신작로는 마을을 가로질러 소청나루로 연결되었고, 마을 남쪽의 모래둑들과 번개들, 수어창들, 북쪽의 궁논들은 모두 수로였거나 갈대가 무성한 갯벌이었다.

지명地名은 동고리에 관한 수많은 역사상을 복원시켜준다. 필자는 동고리 자연마을에 ‘소청말’과 ‘수어창리’, ‘구창리’, ‘신창말’이 있는 것에 주목한다.

일제강점기 이포나루는 ‘아래소청나루’, 궁리의 다라고비진은 ‘위소청나루’로 불렸기 때문이다. 또 1911년 <조선지지> 자료에는 동고리에 ‘수어창진’이 나오고 있어, 일제강점 이전까지만 해도 수어창들의 세곡이 수어창나루를 통하여 실려 나갔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당시 이포나루는 안성천 건너 팽성읍의 곤지진이나 원봉나루, 진위천 건너 오성면의 새터나루로 연결되었다. 계절에 따라 아산만 하구나 옹진군 일대에서 새우젓과 어리굴젓, 소금을 가득 실은 배들도 드나들었다.

이종관(78세), 이백규(78세) 씨는 동갑내기로 2~3대씩 살아온 토박이다. 함께 태어나 고향을 공유하고 추억과 그리움을 함께 하며 늙어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뉘엿뉘엿 오성들 너머로 해가 지는 오후 5시 두 분 어르신을 모시고 마을답사에 나섰다.

일제강점기 간척에 따라 옮겨간 소청나루의 위치와 새창고, 신환포의 위치, 수어창들과 수어창나루, 해답海畓과 육답陸畓이라는 낮선 용어가 발품 속에 살아나온다.

육답은 바닷물이 올라오지 않았던 높은 지대의 경작지라면 해답은 간척지임을 지형은 말해준다. 윗말을 거쳐 국도 38호선을 건너면 궁논들이다. 근대 이전 안성천, 진위천 수로水路는 윗말과 궁논들을 가로질러 원골과 지제동 울성마을까지 올라갔다.

이종관 씨는 지제동 원골에는 이름 모를 무덤들과 무수히 많은 기와편이 출토된다고 말했다. 또 원골 아래는 장터거리로 배가 닿았던 시절에는 장시가 개장되었다고 하였다.

원골의 무덤들은 동고2리 경로당의 노인들에게도 화젯거리였다.

한쪽에서는 동고리 사람 조 씨가 밭일을 하다가 큰 무덤을 파게 되었는데 시체가 썩지 않은 미이라 상태였고 조그만 인형이 출토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으며, 방 씨라는 사람은 트랙터로 큰 묘를 밀어버렸더니 어머니의 꿈속에 어떤 장군이 나와서 무덤을 훼손하면 아들 목숨을 거둬가겠다고 해서 서둘러 복원했다는 이야기, 출토된 무덤을 함부로 대하다가 사고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줄을 이었다.

■ 간척으로 옛 경관은 찾을 수 없어
   
▲ 동고리 정자정미소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동고리의 신환포와 수어창나루에는 경기만의 덕적도에서 새우젓배, 어리굴젓배가 들어왔다.

이곳에 닿았던 배들은 크기가 작은 돛배였다. 배에 실린 젓갈들은 나루터에서 거래되거나 상인들이 지게에 지고 마을을 돌며 쌀이나 보리, 콩들과 물물교환 하였다. 동고리 김 씨는 나루터의 거간이며 말감고였다. 말감고의 손재주는 신묘해서 곡식자루를 들고 새우젓을 사러 왔던 농민들은 손놀림에 따라 울고 웃었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시절 동고리 사람들은 가난했다. 어선이 드나들었지만 어업으로 생계를 잇지는 못했고, 상선이 드나들었어도 포구상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도 없었다.

육답은 소출이 좋은 편이었지만 해답海畓은 걸핏하면 수해와 염해를 입어 수확량이 크게 떨어졌다. 가난한 소작농들은 보릿고개가 되면 식량이 떨어졌다. 그러면 장리쌀을 얻거나 품팔이를 하였다. 이백규 씨는 옛날에는 쌀 한 말을 품삯으로 받으면 8일을 일 해줘야 했다고 말했다.

나루터에 불과했던 동고리 일대가 간척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후기다. <속대전>에도 수어청이 1626년에 설치되고 1636년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야 체제가 확립되었다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간척은 수어창들 일부와 궁논들 일부에 불과했다. 동고리 일대가 본격적으로 간척된 것은 일제강점기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자본가 가등은 조선총독부로부터 간석지와 공유수면 간척허가를 받아 동고리, 궁리, 신리 일대를 간척하고 가등농장을 설립하였다.

필자의 짐작으로는 이때의 간척으로 안성천, 진위천 수로가 크게 바뀌고 아래소청나루로 불렸던 이포나루도 동고2리와 궁1리 사이로 옮겨갔다가 폐지된 것으로 생각된다. 2003년 인터뷰한 이종근(당시 86세) 씨는 일본인 가등이 신환포와 수어창나루 옆에 구창고와 신창고를 지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수탈한 곡식은 이름이 바뀐 아래소청나루로 반출되어 평택역을 통해 실려 갔을 것이고 일제는 그 곡식을 군량미 삼아 한반도와 대륙을 침략했을 것이다.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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