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동화책 읽어주는 행복한 할머니”

 

첫 손자 낳은 뒤 동화책과 인연 맺어
기쁜도서관에서 아이들과 만나는 행복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옛날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른이 되어서도 할머니에게 이야기 들려달라며 어리광 부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엇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이고 풍요로움이었으니 말이다.

손자 덕에 어린이 책과 만나
“첫 손자 산하를 봤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어요. 신비롭고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웠죠. 산하는 자라면서 늘 책을 읽어달라고 했고 동화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곤 했어요. 그때부터 산하에게 좋은 책을 읽어주고 싶은 마음에 어린이 책을 공부하게 됐죠. ‘어린이도서연구회’도 알게 됐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동화책을 읽어주고 싶었어요”
최해숙(77) 이충동 ‘기쁜도서관’ 관장은 이야기를 하는 내내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흰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앞치마를 두른 채 아직도 도서관에서 아이들을 맞이하는 최해숙 관장은 모든 아이들이 그저 예쁘기만 하단다.
“1996년이었을 거예요.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하고 싶어 목사인 남편에게 교회 건물에 있는 방 하나를 빌려달라고 했죠. 남편은 쉽게 허락했고 손수 책꽂이도 만들어줬어요. 1999년에 평택시청에 문고등록을 하고 혼자 힘으로 어린이 도서관 운동을 하기 시작했죠. 남편 월급을 몽땅 쏟아 부으면서요. 훗날 남편은 제가 남편 돈을 다 갖다 쓴다고 농담반 진담반 얘기했지만 그 말 속에는 저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었죠”
최해숙 관장은 어린이작은도서관으로 시작해 ‘송탄 동화 읽는 어른모임’도 함께 꾸려갔다. ‘동화 읽는 어른모임’은 어린이도서연구회 지역모임으로 당시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송탄지역 젊은 주부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들은 학교·보육원·복지관·유치원·어린이집 등을 다니며 책 읽어주기를 이어가고 있다. 

도서관에서 함께하는 행복
“노인이 아이들과 함께 노는 건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복한 일이죠. 핵가족으로 할머니·할아버지는 고사하고 부모 얼굴조차 제대로 볼 시간이 없는 아이들이 도서관에 왔을 때 머리 하얀 할머니가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겠어요? 그 아이들에게 책도 읽어주고 머리도 쓰다듬어줄 때마다 아이들보다 제가 더 행복해지곤 해요”
최해숙 관장은 아주 어릴 때 먼 여행을 다녀온 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은 <소가 된 게으름뱅이 소년>이라는 책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시 처음 갖게 된 그 책은 소중하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소의 탈을 쓴 소년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동물이나 식물 등 살아있는 것들의 들리지 않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도서관에 다니러 왔던 아이들이 이젠 모두 잘 자란 젊은이들이 되었어요. 그 아이들이 도서관에 찾아 오는 날이 가장 행복할 때죠. 아이들은 글자를 배우거나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빌려가는 게 아니라 주인공과 놀면서 닮아가고 싶은 거라는 것도 아이들과 만나며 배운 거예요”
한 아이를 위해 시작한 일이 긴 시간이 흐르면서 제법 밑동이 굵은 느티나무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마음 뿌듯하다는 최해숙 관장은 여전히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이 행복하기만 하다. 그리고 도서관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단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시작한 일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도서관의 역할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을 전한다.

올해 발간할 책, 가족사 담고파
“내가 나고 자란 시절은 참 힘든 시기였어요. 해방될 때가 여덟 살이었고 6·25한국전쟁도 있었으니까요. 전쟁 때 우리 가족들의 삶은 한 번에 무너졌죠. 아버지의 희망이던 오빠가 세상을 떠났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거든요. 난 열여덟 살부터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는데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 보육교사로 있었죠.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힘든 노동부터 장사까지 가족들을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최해숙 관장은 올해 안으로 시대가 빚어낸 아픈 가족사를 담은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특히 아버지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싶다는 최해숙 관장은 가족 이야기를 쓰기 위해 고향을 찾아다니며 기억을 더듬고 있다고 말한다.
“도서관이 교회 건물로 크게 확장이전하면서 일도 많아졌지만 그래도 주변에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서 아직은 잘 해내고 있어요. 나이가 많아져 도서관에서 할 일이 없어지더라도 전 항상 도서관에 앉아 아이들을 맞을 거예요. 아이들에게 이야기도 들려주고 책도 읽으면서요”
세상을 뜨는 순간까지 도서관에서 보내고 싶다는 최해숙 관장,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최해숙 관장은 오늘도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의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으며 따뜻한 고향의 풍경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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