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를 기른 숨은 후원자
이용복 선생


흔히 성공만 강조하지
과정은 무시되는 현실에
음지에서 양지로 향하게 한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숨은 후원자가 있음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 나중에 뭐가 되고 싶으니!?

-대통령이요

1950~60년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통령이라고 대답하는 바보 같은 아이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날’ 어린아이들이 꿈꾸던 그 허황된 꿈은 오늘 대한민국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당시엔 누구라도 공부를 잘해야 하는 목적은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공부를 잘 해야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무슨 큰 비법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공부를 잘해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아이들을 다그쳤습니다. 어서 빨리 돈을 벌어 잘 살아야했습니다. 그래야 가난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나오고 중학교를 갈 수 없어 회사 사무실에 가서 사환으로 일하며 돈을 버는 아이들, 돈이 없어 검정고시 학원조차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은 ‘통신교육’이라도 받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배움의 길을 이어갔습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40년 전 이 나라의 현실이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죽자 사자 공부를 했습니다. 송곳 꽂을 땅 한 뙈기 없이 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온 가난을 벗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몸을 일으켜 공부를 통해 출세하는 길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0년대까지만 해도 가난한 집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정설正說처럼 여겼습니다. 그나마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는 없는 집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한겨울이면 배梨과수원에 가서 가지치기를 하고 봄이면 남의 밭에 가서 거름을 내거나 김을 매주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벌이 사라진 배梨과수원에 가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일일이 손으로 배꽃 암술에 수술가루를 묻혀서 배梨가 열리도록 하는 ‘화접’ 일을 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모내기가 시작이 되면 십리 길을 마다않고 모를 심으러 다녔습니다. 지금처럼 기계로 모를 심지 않았기에 들이 넓은 평택 모내기는 5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모심기는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오히려 일을 더 잘했습니다.

한여름에는 과일행상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태풍이 불어와서 논에서 자라는 벼가 쓰러지면 하나하나 사람 손으로 일으켜 세워야 했습니다. 안 그래도 벼이삭이 달려서 무거워진 벼가 물을 먹으니 볏단은 죽은 송장처럼 무겁습니다. 게다가 물이 찬 논바닥은 미끄러워서 걸어 다닐 수조차 없을 정도로 푹푹 빠집니다. 그야말로 등골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고역이었지요.

하지만 믿을 것이라고는 오로지 몸뚱이 하나 밖에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우리 이웃들은 그나마 일이라도 있는 것을 큰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가을이 왔습니다. 온 들판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서해바다와 맞닿은 소사벌 하늘에 노을빛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들에서는 소리꾼이 부르는 농요에 맞추어 벼 베기에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성동초등학교 앞에 새로운 책방 ‘화성서점’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니까 평택경찰서 길 건너편 평택전매서 옆 가건물에 처음 자리를 잡은 것이지요.

사장인 이용복 선생은 무엇이 되었든 거절할 줄 모르는 ‘Yes man’이었습니다. 동아출판사 평택지사였던 화성서점은 하루아침에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책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돈이 없어 참고서나 수련장을 살 수 없는 아이들에게 이 선생님은 무상으로 책을 지원해주셨습니다.

전과지도서 한 권이면 한 학기를 넘어갈 수 있는 초등학교 학생과 달리 고등학생들은 봐야 할 책도 많은데다가 과목마다 문제집도 다양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가짓수가 많은데 이 선생님은 새로운 문제집이 나올 때마다 학교생활에 충실한 학생들에게 그 모든 문제집들과 학습서를 무상으로 챙겨주셨지요.

날이 갈수록 화성서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문을 연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운 곳에 새로 지은 3층 화성서점으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이용복 선생의 후원도 늘었습니다. 어느 특정한 학교나 학생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학생들 가운데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추천하면 언제든 흔쾌히 지원해주셨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선생님들을 초대해서 학교생활에서 받는 어려움을 잠시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서 많은 선생님들에게 새로운 힘을 실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치르면서 단 한 번도 공치사를 하거나 생색을 내지 않았습니다.

과거가 없는 오늘은 없습니다. 흔히 성공만 강조하지 과정은 무시되는 현실에 음지에서 양지로 향하게 한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숨은 후원자가 있음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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