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고비진은 서평택의 오성·안중·포승·현덕을
연결하는 교통로이며 경기만 일대 수로교통과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는 특별함이 있었다

 

 
▲ 고덕면 해창리와 진위천, 다라고비진이 있었던 궁안교

궁안교가 건설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다리 아래쪽이 나루터였다.
이곳은 바닷물이 드나들 때도
조세潮勢가 약해서
배를 안전하게
접안할 수 있었고
뱃턱이 길게 형성되어서
각종 화물을 쉽게
운반할 수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국도 38호선이 건설되면서
서정장·평택장·안중장과도
잘 연결되었다.


3 - 서평택으로 건너가던 큰 나루 다라고비진

평택은 물의 고장이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40여 개나 되는 하천이 평택평야를 가로질러 아산만으로 흘렀다. 바다와 하천은 수로, 해로교통의 수단이었고, 갯벌은 수산자원의 보고였으며, 나루와 포구는 교통과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나루·포구, 그 위의 삶’을 연재한다. 물과 함께 살아온 평택사람들의 삶을 함께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해창5리 방시천과 서정천 나루터
▲ 궁1리 다라고비진 터 원경

■ ‘다라’는 큰 나루를 의미

‘다라多羅’는 백제어에서 ‘크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백제의 특수행정구역이었던 ‘담로擔魯’의 옛 발음도 ‘다라’ 또는 ‘드르’였다. 옛 백제지역과 일본 그리고 부여 일대에서 흔히 발견되는 ‘쿠다라’, ‘구드래’도 같은 뜻이라는 해석이다.

삼국시대 백제 땅이었던 평택지역에도 ‘다라’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고덕면 궁1리의 마을이름인 ‘다루지’ 그리고 진위천 변에 있었던 ‘다라고비진’이 그것이다. 다라고비진은 <세종실록지리지>와 15세기 후반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온다. 예컨대 <세종실록지리지>에 “장호천長好川은 객관客館 남쪽을 지나 다시 서편으로 흘러 수원부 다라고비진多羅高飛津으로 들어간다”, 또 <동국여지승람> 수원부 조에는 “다라고비진多羅高飛津은 부府 남쪽 67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천(안성천)과 진위현振威縣 장호천長好川(진위천)의 물이 여기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아산만)에 들어간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진위천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가는 나루는 여러 개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탄면 황구지리에 있었던 ‘항곶포’, 고덕면 동청리에 있었던 ‘동청포’ 그리고 안성천과 진위천의 합류지점에 있었던 ‘이포’ 그리고 진위현의 해창海倉이었던 해창리의 ‘해창포’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항곶포는 화성시 양감면, 동청포는 청북면, 이포는 팽성읍과 연결된 나루였고, 해창포는 인마人馬의 통행보다는 조운漕運을 담당하는 포구였다면, 다라고비진은 서평택의 오성·안중·포승·현덕을 연결하는 교통로이면서 경기만 일대 수로교통과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함이 있었다.

다라고비진은 일제강점기 ‘소청나루’, 이웃마을 동청리의 이포나루는 ‘아래소청나루’로 불렸다. 소청은 일본어로 ‘스바라시’라고 읽는데 왜 진위천 변의 나루, 포구들이 ‘소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2015년 새해 벽두 다라고비진을 찾아 궁1리 다루지를 거쳐 진위천과 서정천이 갈라지는 지점의 해창5리 방시천 마을을 답사했다. 진위천 너머로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매서웠고 추위에 웅크린 주민들은 창밖으로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지만 농한기 마을 경로당만큼은 모처럼 여유를 찾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 진위천 궁안교 다라고비진 터
▲ 진위천과 해창리

■ 다라고비진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궁1리 다루지마을 이봉규(1932년 생) 씨는 화성시 양감면이 고향이다. 양감에 살 때 6·25한국전쟁을 맞았으며 제2국민병으로 국민방위군에 편성되어 경북 청도까지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한국전쟁 중 고덕면 궁리마을의 처녀를 만나 결혼하였고 군대에서 전역한 뒤 처가동네인 다루지마을에 정착하였다. 이봉규 씨가 정착했던 1960년대 초 다루지마을 일대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주변에는 물웅덩이가 많았다. 바닷물이 밀려들다보니 농업용수 뿐 아니라 식수도 귀해서 도랑물·웅덩이물을 먹는 집들도 많았다.

궁리마을의 지형이 크게 변한 것은 진위천 제방이 높게 쌓이고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부터다. 제방이 쌓이면서 하천부지와 웅덩이들이 메워져 경작지로 변하였고 일부 저습지는 양식장과 낚시터로 바뀌었다. 다루지마을의 뱃터는 마을서쪽 김승선 이장 집 옆에 있었다. 10여 년 전 인터뷰한 김승선 이장도 자기 집 옆이 옛 나루터였노라고 확인해주었다.

나루터에는 봄·가을이면 새우젓·조개젓·굴젓을 가득 실은 상선들이 닿았고, 진위천 너머 오성면 신리 삼동촌이나 당거리 길마원으로 건너가는 나룻배가 출발하였다. 주민들 가운데는 배를 타고 오성들로 건너가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었다. 다루지마을 뱃터가 진위천 변의 중요한 나루였음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다라고비진’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큰 나루는 규모 뿐 아니라 육로교통(신작로)과 연결되어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궁금증은 해창5리 안기호(82세) 씨를 만나면서 해소됐다. 안기호 씨는 다루지에서만 7대를 살았고 1946년 일명 병술년 물난리를 겪으며 해창5리 방시천 마을로 이주한 순토박이였기 때문이다. 안기호 씨는 궁안교가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다리 아래쪽이 나루터였다고 말했다. 이곳은 바닷물이 드나들 때도 조세潮勢가 약해서 배를 안전하게 접안할 수 있었고 뱃턱이 길게 형성되어서 각종 화물을 쉽게 운반할 수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국도 38호선이 건설되면서 서정장·평택장·안중장과도 잘 연결되었다.
 

▲ 고덕면 궁리 부근 진위천의 겨울
▲ 궁1리 다루지마을

■ 궁안교가 놓이면서 큰 변화

나루터에서의 삶은 역동적이었던 반면 그리 녹록한 것도 아니었다. 다라고비진(소청나루)에는 중선中船이 닿았다. 그래서 ‘중선머리’라고 불렀다. 중선中船은 한선이라고도 부르는 평저선이나 거룻배와 달리 높다란 중 돛을 달았고 배의 규모가 커서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저어서는 움직일 수 없는 선박이었다. 중선이 다라고비진에만 닿았던 것은 아산만 조수의 양과도 관련 있었지만 무엇보다 궁안교가 놓이면서 배의 폭과 돛의 높이가 다리 난간 사이를 통과할 수 없었던 이유도 존재했다.

 안기호 씨 집은 다라고비진을 드나드는 뱃사람들의 안식처였다. 늦가을이면 중선들은 새우젓이나 조개젓을 싣고 다라고비진에 정박해서는 안기호 씨 집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장사를 했다. 배가 들어오면 개인 소매상들이 오쟁이나 지게를 지고 몰려들었다. 때로는 거간꾼들도 나타나서 일정 물량을 대신 팔아주고는 구전을 받아갔다. 개인 소매상들은 젓갈을 지게에 지고 동네마다 돌며 곡물과 물물교환을 했다.

다라고비진에 경기만의 배들이 드나들면서 에피소드도 만들어졌다. 안기호 씨의 6대조 때에도 다라고비진에 중선이 들어왔다. 한 번은 뱃사람들과 어울리던 중 6대조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닌 옹진군의 선적도가 천하의 명당이라는 이야기였다. 후손들에게 조상의 음덕이라도 물려주자는 욕심에 6대조는 자신이 죽으면 선적도에 장례를 지내라고 유언하고는 대목장을 불러 선박을 건조했다. 6대조가 작고한 뒤 5대조께서는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배를 타고 선적도까지 가서 장례를 치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배가 난파되었고 함께 타고 갔던 사람들은 조난되었다가 몇 달 만에 구살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다라고비진은 일제강점기 국도 38호선이 가설되고 다리가 놓이면서 역할이 줄어들었다. 소청교로 명명된 다리는 처음엔 목교木橋였다. 목교는 수해에 취약해서 장마철 물이 불어 오르면 떠내려가기 일쑤였다. 일제강점기 신문에도 궁안교가 떠내려가는 바람에 바지선을 동원해 사람과 자동차를 실어 날랐다는 기사가 있다. 그래서 1938년 일제는 목교를 철거하고 콘크리트로 궁안교를 놓았다.

콘크리트 다리공사가 시작되면서 다리 입구에는 노무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막이 생겼다. 주막은 다리가 준공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장사를 했다. 서평택으로 건너가는 다리 입구에 자리 잡은 주막은 장사가 잘 되었다. 기생도 여럿 두었지만 무엇보다 주막집 주인이 근동에서 알아주는 미인이었다. 행인이 많이 오가는 주막이다 보니 주막을 거점으로 행패를 부리는 무뢰배들도 나타났다. 특히 주막집 여주인의 5촌 당숙이 알아주는 무뢰배였는데, 이 사람은 낮선 사람이 길을 가면 억지로 주막집에 불러들여 술을 먹였고, 투전판에도 끌어들여 호주머니를 다 털게 한 뒤에야 보내줬다.

다라고비진은 1974년 아산만 물길이 막히면서 폐항되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잡았던 사연 많던 주막들도 모두 폐업했다. 다만 궁안휴게소만이 굳건히 남아 옛 시절을 추억할  뿐이다.

 

▲ 팽성대교 상공에서 바라본 궁안교와 오성평야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