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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3. 나루·포구 그 위의 삶>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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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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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양포는 고려시대 안성천 유역의 대표적 포구
고려시대 13조창 가운데 하나인 하양창이 설치됐으며
초마선 6척과 외관록 20석을 받는 판관을 배치했다

 

 

근대 이후 경양창이 폐지되면서
경양포는 아산만 어업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포구는 안성천과 둔포천의
합류지점에 있었다.
이곳을 고지도에서는
‘계양해구’라고 기록하였고
마을에서는 ‘뱃말’이라고 부른다.
뱃말에는 경기만의
새우젓배·굴배·소금배가 드나들고
성어기에는 서해연안의
어선들이 모여들었다.
관리들이 상주하며
수탈하는 일도 없었다.

 

 
   
▲ 팽성읍 노양1리 경양포구 뱃터


5 - 경기남부를 대표했던 포구 경양포

평택은 물의 고장이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40여 개나 되는 하천이 평택평야를 가로질러 아산만으로 흘렀다. 바다와 하천은 수로, 해로교통의 수단이었고, 갯벌은 수산자원의 보고였으며, 나루와 포구는 교통과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나루·포구, 그 위의 삶’을 연재한다. 물과 함께 살아온 평택사람들의 삶을 함께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1973년 건축한 팽성읍 노양1리 경양포구 구룡교

■ 하양창의 옛 영화, 그 흔적은 어디에

팽성읍 노양리 경양포는 고려시대 안성천 유역의 대표적인 포구였다. 당시에는 아주(아산) 편섭포라고 불렀다. 고려시대 편섭포에는 13조창 가운데 하나였던 하양창이 설치되었다.

<고려사>에 하양창은 양광도 일부의 세곡을 담당하였으며 한 척에 1000섬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과 외관록 20석을 받는 판관이 배치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안성천 하류에서는 소금도 생산되었다. 고려시대 소금은 국가의 중요한 재원이었다. <고려사>에는 태조 왕건이 도염원都鹽院을 설치하고 소금 전매를 실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종 때에는 국가가 직접 가마솥을 소유하고 소금을 구워냈다. 구워진 소금은 백성들에게 배급도 주었고 일부는 판매하여 국가수입을 늘렸다. 충선왕 때에는 ‘각염법’을 개정하여 사적인 제염을 엄격히 통제하고 정해진 날짜에만 백성들에게 팔도록 하였다. 이처럼 귀한 소금이 경양포 일대에서 생산되면서 고려 후기 노양리 일대에는 경양현이 설치되었다.

조운과 소금이 생산되고 해로와 수로가 만나는 지점에 포구가 있다 보니 하양창에서는 포구상업도 발달했다. 구전에 따르면 고려 후기 경양현에는 3백 호가 넘는 민가가 있어 좁은 골목이 끝없이 이어졌고 노양2리 노산포에도 2백 호가 넘는 민가가 있었다고 전한다.

경양포는 때로 변란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 무신정권 때 진위민란을 일으켰던 이장대 일당이 고덕면의 종덕창과 경양현의 하양창을 점령하여 군량미로 삼았던 사례라든가, 고려 후기 왜구들이 팽성읍과 경양현 일대를 집중 공격했던 이유도 조창의 세곡과 관련 있었다.

하양창은 조선 태조 5년에 폐지되었다. 한양천도 후 경기도의 세곡운송을 각 고을이 맡도록 조처한 것에 따른 것이다. 대신 경양포에는 직산현과 평택현의 세곡을 담당했던 경양창이 설치되었다. 경양창은 계양창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렀다.

지금도 지역명칭으로 불려지는 ‘계양’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조선전기 경양창에는 수운판관이 파견되었다가 후기로 가면서 직산현감이 대신하였다. 현감들 가운데는 제법 공적을 세운 사람도 있었는지 노양1리 비석거리에는 직산현감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러다가 2008년 지역상수도공사를 하면서 한쪽에 치워 놓았던 것을 무지한 폐기물 차량이 싣고 가면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 파시에는 술 파는 주막이 즐비했던 경양포 뱃터
   
▲ 노산포가 있었던 노양2리 노산마을

■ 아산만 어업은 4월 당개, 5월 망개가 제철

근대 이후 경양창이 폐지되면서 경양포는 아산만 어업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포구는 안성천과 둔포천의 합류지점에 있었다. 이곳을 고지도에서는 ‘계양해구’라고 기록하였고 마을에서는 ‘뱃말’이라고 부른다. 뱃말에는 경기만의 새우젓배·굴배·소금배가 드나들고 성어기에는 서해연안의 어선들이 모여들었다. 조선시대처럼 관리들이 상주하며 수탈하는 일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계양에서 살았다는 구재권(2009년·78세)씨는 계양해구 어업은 ‘4월 당개 지나 5월 망개가 제철’이라고 말했다.

해방 전까지 둔포천은 아산 신남리 신흥포(남창)를 지나 경양포 앞으로 흘렀는데, 4월에 남창 당개로 몰렸던 고깃배들이 5월이면 어족자원이 풍부한 계양해구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봄가을 성어기가 되면 경양포는 제철을 맞았다. 고기잡이 나갔던 어선들이 빽빽하게 정박했던 뱃터에는 간이주막들이 줄지어 섰고, 주막마다 생선회를 맛보러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주모들은 작부를 고용하여 술을 따르게 했고 때론 육자배기 한 자락을 뽑아 흥을 돋웠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서 원동에서 찾아온 걸립패와 잡상인들도 따라 들어왔다.

부용초등학교나 둔포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원족(소풍)을 오기도 했으며, 본의 아니게 술을 먹고 시비가 붙어 큰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성어기 경양포에 정박하는 어선들은 100여 척이 넘었다. 어선들은 멀리 파주나 행주에서도 왔고, 충청도 내포지역에서도 몰려들었다. 고깃배들은 소형어선도 있었지만 연근해어업을 하는 중선이 더 많았다. 중선(中船)은 주로 파주나 서산에서 왔는데 낭장 같은 어구로 숭어와 강다리·꽃게·황석어·새우를 잡았다. 계절별로 숭어는 3월과 4월, 강다리는 보리 패는 4월과 6월 사이에 많이 잡혔다.

경양포 주민들은 대부분 댄마(전마선)라는 소형어선을 부렸다. 어부들이 고기를 잡아오면 일부는 나루터 주막에서 소비하고, 나머지는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이 도매로 떼어다가 주변 농촌을 돌아다니며 곡식이나 돈을 받고 팔았다. 그래도 남은 생선은 햇볕에 말리거나 반찬을 해먹었다.

1960년대 초부터 어업협동조합에서 위탁판매를 시작했다. 교통이 편리해지고 위탁판매가 시작되면서 주민들의 살림은 점차 나아졌다. 하지만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 어업환경은 크게 변했고 생업을 잃은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으로 전환하였다.

 

   
▲ 진달래가 아름다워 꽃동산이라고 불렀다는 노양2리 꽃산
   
▲ 팽성읍 노양1리 계양 서낭당 터

■ 경양포와 함께 번성했던 노산포

경양포 동쪽 꽃산 아래에 노산포가 있었다. 노산포는 둔포천 수로의 주요 포구였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노산포는 조선후기 경양포 수운판관과 아전들의 탐학을 피한 어선들이 정박을 하면서 포구와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평택문화원에서 발행한 자료에는 ‘노산포는 한 때 2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는데 수해가 빈번하고 간척이 활발하면서 크게 줄었다’고 기록하였다.

둔포의 성장도 노산포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둔포는 온양온천행궁과 충남 보령의 오천수영으로 연결된 충청수영로와 둔포천 수로가 만나는 지점이어서 일찍부터 장시와 포구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둔포가 상업적으로 번성하면서 어업이나 포구상업에만 의존했던 노산포는 점차 경쟁력을 잃었다. 더구나 일제강점기 이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간석지와 수로가 개간되면서 주민들 가운데 농업으로 전환하는 사람이 많았다. 갯벌이 간척된 뒤에도 남아 있던 일부 갯골은 포구 역할을 하였다. 노양1리에서 태어나 열아홉에 노양2리로 시집온 장영자(85세·1931년생)씨는 해방 전까지만 해도 갯골로 배가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본래 노산에서 살다가 병술년(1946) 물난리를 만나 꽃산 아래로 이거한 김민중(80세·1936년생)씨도 어릴 때 둔포천의 지류가 마을을 휘돌았고 포구 안에 소금창고가 있어 소금배·새우젓배가 많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포구의 모양은 변했고 토박이들도 대부분 고향을 등졌지만 노양2리 노산포에는 아직도 옛 포구와 지난했던 간척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예컨대 갯골이었던 지역에는 골장·해다리·댕고지·은구통·돌다리·흙다리와 같은 지명이 있고, 민중들의 소규모 간척의 흔적인 앞원안·뒤원안 같은 지명도 남아 있다.

필자들은 아시겠지만 댕고지는 곶串 형태의 지형, 골장은 깊게 패인 갯골, 돌다리·흙다리는 갯골을 건너다니던 작은 다리를 말한다는 것, 또 원은 민중들이 손과 지게로 축조한 1000~2000평 규모의 작은 간척지, 해다리는 원둑 쌓은 제방 위로 건너다녔던 둑, 은구통은 큰 웅덩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빛이 밝을수록 어둠은 깊다’라는 말이 있다. 하양창도 고려 후기에 누렸던 부귀와 영화의 뒤편에서 짙은 어둠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근대 이후 수로교통보다 육로나 철도·항공기의 이용이 많아진 것도 포구 쇠퇴의 원인이다. 경양포와 노산포가 쇠퇴하면서 포구 근처에 성업했던 간이주막들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것은 나룻터의 상설주막도 마찬가지. 그러다가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었다. 방조제가 준공되면서 경양포는 어업이나 포구상업과 이별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리고 더 이상 과거의 영화는 재현되지 않았다. 

 

 

   
▲ 지금은 내수면 어업과 낚시 명소로 유명한 경양포구와 노을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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