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도 찾아오는 동네 방앗간이죠”
2대째 방앗간 운영, 단골은 동네 할머니
어릴 때 봐온 방앗간, 이젠 내가 풍경돼
명절이면 떡을 만들기 위해 도로까지 길게 줄을 서고 그 풍경 너머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맛있는 떡들이 주인을 기다리던 곳, 한쪽에서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참기름을 짜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고춧가루를 빻느라 분주했던 곳, 힘들던 시절에도 마음이 넉넉하고 풍요로웠던 그곳은 바로 동네 방앗간이었다.
방앗간, 40여년 한자리 지켜
“예전엔 방앗간이 정말 바빴어요. 명절이면 손님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죠. 명절이 가까워 오면 보름 정도는 아침 6시부터 저녁 7~8시까지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을 했어요. 구정을 한번 치르고 나면 떡에 조금씩 넣는 30kg 소금을 20가마니 정도 쓰곤 했으니까요. 부모님끼리 대화할 때도 얼마나 장사가 잘 됐느냐는 표현을 이번 구정엔 소금을 몇 가마나 썼느냐고 묻는 것으로 대신하곤 했죠”
통복동에서 ‘서울떡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는 정주성(58) 대표는 부모님의 대를 이어 15년째 방앗간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후미진 통복동 골목에 자리 잡은 서울떡방앗간은 아직도 정주성 대표의 부모님이 쓰시던 간판도 그대로이고 명패도 돌아가신 아버지 함자 그대로다.
“부모님은 역 부근에서 ‘역전방앗간’을 운영하다가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74년에 서울사람이 운영하던 서울떡방앗간을 인수하셨어요. 그때는 어머니가 주로 일을 맡아 하셨는데 멀리서도 떡살을 이고 오면 이천 원 정도는 에누리로, 이천 원 정도는 택시비로 다시 돌려주곤 하셨죠. 어머니에게는 떡값보다 사람의 정이 더 우선이었던 거예요”
어린 시절부터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지만 방앗간 일을 도운 적은 없었다는 정주성 대표는 이제 어엿한 방앗간 사장이 되어 15년째 부모님의 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방앗간을 맡게 된 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모친 작고 후 방앗간 물려받아
“군대 제대 후 서울 건설업체에 들어가 일하다가 30대 후반부터 독립해 사업을 시작했어요. 하청을 받아서 조립식 공장 등을 지었는데 규모도 컸고 돈도 많이 벌었죠. 그러나 1997년 IMF가 터지고 원청이 부도나면서 다시 일어설 힘을 잃게 됐고 마흔 네 살 되던 2000년도에 방앗간 허드렛일이라도 돕자는 생각으로 고향에 내려와 일하게 됐어요. 그런데 얼마 후 어머니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아버지는 병간호에 매달리니 자연히 방앗간은 제 몫이 된 거죠”
정주성 대표는 당시 방앗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해 추수감사절에 교회에서 대량의 떡 주문이 들어오게 됐고 믿고 기다린 아버지는 술에 취해 들어와 아연실색하는 아들을 뒤로하고 방에 들어가 태평하게 주무시기 시작했다고.
“40kg 쌀 20가마에 부재료로 들어가는 팥이 20가마나 되는 대량 주문이었으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어요. 시간은 얼마 안 남았는데 아버지는 취해서 주무시니 얼마나 답답했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얼마 후 일어나신 아버지는 여유 있게 쌀가루를 빻고 커다란 시루 4개를 4단으로 올려 한꺼번에 16개씩 쪄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찌나 척척 일을 해내시는지, 제 쓸데없는 걱정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죠”
정주성 대표는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일의 순서를 깨우치고 나자 그때부턴 아무리 많은 일이 있어도 겁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후 4~5분에 떡시루 하나씩 쪄내야 하는 정신없이 바쁜 명절을 몇 번 겪고 나니 이젠 작업 속도도 빨라지고 요령도 늘게 됐다고.
좋은 재료가 맛있는 떡 만들어
“전 할머니들하고 잘 지내요. 부모님이 운영하실 때부터 우리 방앗간에 오시던 분들이죠. 지금은 부모님이 하실 때보다 고객 수도 더 늘었구요. 떡이야 쌀·소금·물·수증기만 있으면 되는 것이니 특별히 맛을 좌우할만한 건 없는데도 손님들이 맛있다며 진위나 청북·오성면에서도 찾아오시니 고마울 뿐이죠”
정주성 대표는 예전 사업을 할 때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칠전팔기 정신으로 다시 일어서곤 했지만 살아오는 동안 가장 힘든 일은 두 번이나 가정의 위기를 겪게 된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정형편이 순탄치 못해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며 잠시 말을 멈춘다.
“큰딸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데 늦둥이로 낮은 중학생 딸아이가 제일 걱정이죠. 늦게 본 자식인 만큼 너무 사랑스럽고 예쁜데 아무래도 내가 나이가 많다 보니 만일 내가 없어도 혼자 잘 지낼 수 있게 하려면 지금부터 강하게 키워야 하니까 자주 엄하게 야단을 치곤해요. 그게 또 마음이 아프죠”
손님이 너무 많아져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부담스럽다는 정주성 대표, 동네 40여년 단골인 할머니들을 어머니처럼 편하게 대하는 정주성 대표는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보면서 자랐던 방앗간에서 이제는 방앗간의 역사만큼 넉넉하게 나이 들어가는 현재 자신의 모습이 가장 좋다며 가만히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