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전 현덕면에는 나루와 포구가 많았다
큰 나루는 계두진·구진·석화진·당포진이 있었으며
수로교통 거점, 어업·포구상업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1974년 아산만방조제 건설로
나루가 수명을 다하면서
아산만 어업과 풍어제·뱃고사
나루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서린
나룻배 운행도 중단되었다.
포구가 닫히면서
덕적도에서 들어온 소금장수가
주막집 아가씨에게 홀려
소금 판 돈을 모두 날리고
돌아갔다는 사연도
파주에서 들어온 강다리배 선주가
노름으로 어선까지 날리고
빈 몸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모두 평택호 속에 잠겨버렸다.

 

▲ 현덕면 대안리 구진앞들 평야에서 평택호 방향으로 바라다 본 전경, 마안산과 대안4리 구진마을(왼쪽 위) 오른쪽으로 옛 구진나루가 보인다.

 

 


6 - 배따라기마저 떠나버린 안성천 뱃머리 신왕나루

평택은 물의 고장이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40여 개나 되는 하천이 평택평야를 가로질러 아산만으로 흘렀다. 바다와 하천은 수로, 해로교통의 수단이었고, 갯벌은 수산자원의 보고였으며, 나루와 포구는 교통과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나루·포구, 그 위의 삶’을 연재한다. 물과 함께 살아온 평택사람들의 삶을 함께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현덕면 대안리 구진나루와 어선의 옛 모습(1957년)
▲ 현덕면 신왕리에 자리했던 옛 신왕나루(1985년)

■ 조선 후기에는 ‘당포진唐浦津’으로 불러

현덕면에서도 ‘광덕廣德’은 특별한 지역이다. 광덕은 고려시대 광덕현이었으며 조선건국 후 수원도호부에 편입된 뒤에도 ‘광덕면’으로 일정한 영역을 보장받았다. 광덕면이 독립된 지위를 잃은 것은 1914년이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원군 현암면과 가사면·광덕면이 통합되면서 현덕면이 된 것이다. 근대 이전 현덕면에는 나루와 포구가 많았다. 큰 나루만 해도 계두진·구진·석화진·당포진이 있었으며, 어민들이 이용하던 작은 포구는 이보다도 더 많았다. 안성천 하구의 나루·포구들은 수로교통의 거점이면서 아산만 어업과 포구상업의 전진기지였다. 그 가운데 신왕나루는 현덕면 권관리의 계두진, 팽성읍 노양리의 경양포, 아산의 백석포와 함께 안성천 하류를 대표하는 나루였다.

신왕나루라는 지명은 근대의 산물이다. 조선시대 <읍지>, <지리지>에는 당포진·당진포로 기록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된 지명은 당포진. 당포진은 16세기 전반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포진堂浦津’으로 표기되었지만, 1899년에 편찬된 <수원군읍지>와 18세기 후반의 <여지도서>에는 ‘당포진唐浦津’, ‘당진포唐津浦’라고 기록되었다. 또 당포진은 ‘수원부에서 90리 지점에 있으며 아산의 여러 고을들과 통하는 첩로’라고도 기록하였다.

포구의 명칭에 ‘당唐’자가 들어간 것은 이곳이 삼국시대 당나라와 연결된 나루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충청도 당진과 연결되었기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가까운 팽성읍 노양리 경양포나 아산의 백석포 뿐 아니라 삼국시대에는 당나라, 근대 이전에는 당진 일대와 연결된 나루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조선후기 당포진은 포구상업이 발달한 나루였다. 19세기 말의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도 청어·조기·미역·미곡·대맥·조·소금·목화·창호지·우피·담배에 관한 조세를 당포진에서 거둬갔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당포진의 포구상업이 아산만 일대의 어염 뿐 아니라 미곡과 목화·담배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 반농반어의 마을이었던 현덕면 신왕2리 원신왕
▲ 포구를 간척하여 조성한 현덕면 신왕리 말머리

■ 파시波市에는 기생 둔 술집이 즐비

신왕나루는 ‘광덕나루’로도 불렀다. 본래 ‘고등산’과 ‘심복사’의 본래 이름이 ‘광덕산’ ‘광덕사’였고 아직도 대안리에는 광덕분교가 남아 있어 새삼스런 지명은 아니다. 나루터는 신왕1리 말머리에 있었다. 말머리는 30호 내외의 마을로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안성천 하구의 대표적인 어촌이었다. 안성천 하구와 아산만 일대에서는 이른 봄에 잡히는 숭어를 비롯해서 강다리·뱅어·준치·새우와 같은 어종이 많이 잡혀 봄·가을이 되면 서해안의 고깃배들이 몰려들었다.

신왕리에는 5톤급 중선배만 10여 척, 작은 어선들은 30여 척 넘게 있었다. 중선中船은 우리나라 전통의 평저선이 아니라 일본배 형태를 빌려온 왜중선이었다. 중선들은 안강망이라는 어구를 사용해서 아산만 뿐 아니라 서해 연안을 오르내리며 고기를 잡았고, 작은 어선들은 안성천 하구에서 투망이나 삼중망을 이용해서 숭어와 강다리·농어·삼치·준치를 잡았다. 지금은 금값보다 비싼 꽃게는 잡아도 판로가 없어 반찬으로 먹거나 버렸고, 장마철에는 최고의 횟감으로 꼽히는 농어를 낚시만으로 100kg이상씩 잡았다. 9월에서 10월 파시에는 산란을 위해 안성천을 거슬러 오르는 민물장어도 잡았다. 섬진강 일대에서 많이 잡히는 참게와 함께 재첩보다 희고 작으면서도 맛이 좋은 씨조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잡았다. 가난했으면서도 모든 것이 풍성했던 시절들이었다.

파시波市가 되면 신왕나루는 활기가 넘쳤다. 말머리산 끄트머리에 있었던 뱃터 주변에는 하얀 천막을 두른 간이술집들이 15~16집씩이나 문을 열었으며 고깃배들은 흰돛·황포돛을 달고 위풍당당 바다로 나갔다. 나루터 커다란 미류나루에는 아이들을 위한 그네가 설치되었으며 간간이 약장수들이 출현하여 순진한 시골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 나루터의 간이주막들은 아가씨를 고용해 술과 회를 팔았다. 주요 고객은 생선회를 맛보려는 관광객들이었지만 저녁이 되면 고기잡이에 지친 어부들과 소금배·새우젓배를 타고 들어온 상선들도 등록된 고객이었다.

술집 아가씨들은 지분냄새와 값싼 웃음으로 순진한 배따라기들을 꼬드겼다. 매상을 올리기 위해 술과 회를 게걸스럽게 먹어댔으며 호주머니가 두둑한 남자들을 노름판으로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신왕나루 일대에는 ‘술집 여자들은 소금 한 배를 먹어도 짜다는 법이 없다’는 말이 유행했다. 서산과 당진에서 숭어 잡이 왔다가 술과 여자에 빠지는 바람에 빚만 잔뜩 져서 고기 잡아 갚아주고 돌아갔다는 사연, 덕적도에서 소금 한 배 싣고 들어왔다가 술집여자에게 모두 털리고 빈 배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나루터 주변에 파다하게 떠돌았다.

 

▲ 바닷가 마을이었던 현덕면 대안2리 의경재
▲ 옛날에는 바닷가 마을이었던 대안4리 사랑재

■ 뱃사공마저 떠난 빈 나루에는 물결만이

신왕리 사람들은 풍어제와 뱃고사를 함께 지냈다. 풍어제는 정월에 마을제당에서 지냈고 뱃고사는 배 위에서 지냈다. 뱃고사는 정월 열나흘과 출어를 할 때마다 지냈다. 어부들은 대보름이 가까워오면 배를 닦고 뱃기를 꽂은 뒤 제물을 진설했고 고시례를 한 뒤에야 술을 올렸다. 대보름 뱃고사는 풍어제와 마찬가지로 시루떡과 북어·삼색실과에 돼지머리를 올렸다. 대보름에는 성대했지만 출어를 할 때는 ‘조금때’를 기다렸다가 약식으로 지냈다.

경양포와 백석포를 오가는 나룻배는 신왕리에서 운영하였다. 아산만방조제가 건설되기 전까지 만해도 현덕면은 오지 중의 오지여서 평택으로 나가 기차를 타거나 아산·당진으로 갈 때면 나룻배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다. 나룻터의 뱃사공은 황OO 씨였다. 황 씨는 밤이나 낮이나 건너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룻배를 띠웠다. 황 씨 덕분에 아산 사람들은 쉽게 수원과 서울을 오갈 수 있었으며, 현덕면 사람들도 팽성읍 노양1리 경양포에서 내려 평택역과 평택장을 오갈 수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이렇게 광덕사람들의 발이 되어준 황 씨의 고마움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환갑 때는 나루터에서 환갑잔치를 해주었으며 대안리로 넘어가는 서낭나무 옆에 송덕비까지 세워주었다. 황 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공 몇 사람이 나루터를 지켰다. 하지만 황씨 처럼 안전하고도 성심껏 일해주지는 못했다고 한다.

신왕나루는 1974년 아산만방조제 건설로 수명을 다했다. 나루가 수명을 다하면서 아산만어업과 풍어제·뱃고사 그리고 나루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서린 나룻배 운행도 중단되었다. 포구가 닫히면서 덕적도에서부터 들어온 소금장수가 주막집 아가씨에게 홀려 소금 팔은 돈을 모두 날리고 돌아갔다는 사연도, 파주에서 들어온 강다리배 선주가 노름으로 어선까지 날리고 빈 몸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모두 평택호 속에 잠겨버렸다.

방조제 건설 뒤에도 신왕리 어민들은 어업계를 조직하고 한동안 어업을 계속했지만 물속에서는 숭어와 강다리 대신 민물어종인 붕어·잉어·민물새우가 잡혔다. 어업이 중단되면서 정부는 어업보상을 실시했다. 어업보상은 쌀 한 가마에 3만원일 때 30~40만원씩 지급되었다. 어민들은 고기잡이가 어려워지면서 농업으로 전환하였다. 주업이 부업이 되고 부업이 주업이 된 셈이다. 어업이 중단되면서 풍어제와 뱃고사도 중단되었다.

다만 근래 신왕리에서 여선제를 운영하는 행위예술가 김석환 선생이 어민들의 옛 기억을 끄집어내 ‘신왕나루 뱃고사’ 퍼포먼스를 거행했고 지금은 평택문화원과 현덕면주민자치위원회가 주관해 진행하고 있다. 광덕 사람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던 황포돛배 뱃사공의 사연도 1970년대 새마을사업 때 황 씨의 송덕비를 땅 속에 묻어버려 행방이 묘연하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의 추억들이 사라진 세상에 산다.

 

 

▲ 당제도 지내고 풍어제도 지냈던 현덕면 신왕리 당산의 당목들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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